Q. 중세 유럽은 교황의 힘이 나라의 왕보다 더 강해 있나요
안녕하세요. 박순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교황제도는 고대 로마제국 시대에 발생했으며 현대 가톨릭교회에 이르기까지 오랜 세월 동안 지속된 제도이다. 그러나 왕권적 힘과 권위를 속성으로 가지는 교황권은 중세의 역사를 대표할 만한 이념이요 현상의 하나로서 중세적 창조물이라 할 수 있다. 1870년 제1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선포된 가톨릭교회의 교리에서 “교황은 성 베드로의 후계자로서 그리스도가 사도의 군주에게 부여한 최고의 권위를 상속받는다”라고 명기할 정도로 수위권에 기초한 교황의 절대적인 권위가 중세로부터 현대에까지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그러한 교황의 권위는 중세 시대에 교회와 세속의 끊임없는 갈등과 충돌 속에서 형성된, 즉 중세의 역사적 환경이 만들어낸 독특한 요소라 할 수 있다. 교황권 이념은 로마교회와 지역 교회들과의 관계 속에서 점차 형태를 가지기 시작했으며, 교황 권력과 세속 권력의 충돌과 갈등 속에서 초월적인 권위를 지향하였다. 중세 가톨릭교회가 고대의 교회나 현대의 가톨릭교회와 다른 점은 교회 자체의 문제에만 관심을 국한하지 않고 세속 국가와 긴밀한 관계를 가지거나 첨예하게 대립하면서 정치적으로 강력한 힘과 영향력을 발휘했다는 점이다. 그러한 상황 속에서 로마주교인 교황이 주장한 수위권, 완전권, 보편적 권위를 세속 국가와 군주까지를 대상으로 적용하고자 하였다. 즉 교황은 교회의 수장일 뿐 아니라, 황제나 왕을 포함한 모든 세속 권력에 대해서도 우월권을 주장하였다.
Q. 사극에서 나오는 사서오경이 뭔가요?
안녕하세요. 박순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사서오경 또는 사서삼경은 유교의 교육 및 교양 서적으로, 유교 교육의 가장 핵심적인 책이다. 기원전 300년 전에 기록되었다. 사서는 "논어", "맹자", "대학", "중용"을 말하고, 삼경은 "시경", "서경", "역경"을 말한다.
Q. 세계 2차대전에대해 궁금합니다
안녕하세요. 박순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제2차 세계 대전은 1939년 나치 독일의 폴란드 침공에 의해 발발하여 나치 독일, 이탈리아 왕국, 일본 제국 3국을 중심으로 한 추축국과, 이에 미국과 영국, 소련, 중화민국 국민정부, 프랑스가 이끄는 연합국[7]이 맞서면서 1945년 일본 제국이 항복할 때까지 총 6년 동안 이어진 전쟁이다.[8]제1차 세계 대전 이후 21년 만에 두 번째로 일어난 세계 대전으로, 현재까지 인류 역사상 최대 규모이자 최악의 전쟁으로 평가받는다.
Q. 조선시대 사약은 어떤 성분으로 이루어졌을까요?
안녕하세요. 박순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조선시대에 사약을 만드는 기관은 내의원이었고, 그 조성은 비밀로 되어 있어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대략 비상, 부자, 초오, 천남성 등의 약재를 섞어서 만들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비상은 비소화합물로 유해중금속인 비소를 일정량 이상 복용하면 구토, 설사와 함께 중추신경이 마비되게 한다.
Q. 우리나라는 언제부터 '원'이라는 화폐단위를 사용했나요?
안녕하세요. 박순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우리나라에서 고려시대에 은병(銀甁)·해동통보(海東通寶)·쇄은(碎銀)·소은병(小銀甁) 등이 주조·발행되었지만, 일반적인 교환수단으로 널리 사용된 것은 포화(布貨)나 곡화(穀貨), 특히 미화(米貨)였다. 이들 사이의 교환비율은 문헌에서 많이 찾아볼 수 있다.조선시대에 들어와 전기(前期)에 정부불환지폐라고 말할 수 있는 저화(楮貨)가 발행되었고, 또 동(銅)으로 조선통보(朝鮮通寶)·전폐(箭幣)와 같은 화폐가 주조, 발행되었지만 일정한 화폐 단위가 확립되어 있지는 못했던 것 같다. 이를테면, 저화는 장(張)으로 헤아리고 있었으며, 더구나 일반 민간에서는 역시 포화나 곡화, 특히 미화가 물품화폐로서 일반적인 교환수단으로 유통되고 있었다.우리나라에 화폐 단위가 확립된 이후 그 변천과정을 보면 다음과 같다.조선 후기에 들어와서, 숙종연간(1675∼1720)에 상평통보(常平通寶)가 분산적으로 널리 주조, 발행되어 18세기에 들어와서는 국경지방을 제외하고는 상평통보가 거의 전국적으로 일반적인 교환수단으로 유통되었다. 그래서 전근대적인 화폐형태이기는 했지만, 일단 화폐경제 단계에 들어섰다고 말할 수 있게 되었다.상평통보는 흔히 엽전(葉錢)이라고 불리게 되었는데, 이는 개수화폐(個數貨幣)인 상평통보를 민간에서 한 닢[葉]·두 닢 등으로 헤아린 데서 유래된 것이다. 『속대전』 국폐조(國幣條)에 “국폐에 동전을 사용한다.동전에는 ‘常平通寶’라는 각자(刻字)가 있고, 1문(文)의 무게는 2돈[錢]5푼[分]이다. 100문은 1냥(兩)이 되고 10냥은 1관(貫)이 된다. ”는 화폐산식(貨幣算式)이 정해져 있었다.그러나 『목민심서(牧民心書)』 제2부 율기육조(律己六條) 제5장 절용(節用)과 『만기요람(萬機要覽)』 재용편(財用篇) 전화조(錢貨條)에서 보는바, 실제로는 문과 냥 사이에 전(錢)이라는 단위가 존재하고 있어 ‘1관=10냥=100전=1,000문’이라는 십진법에 의한 화폐산식이 적용되고 있었다. 여기에서 기본이 되는 화폐 단위는 냥이었다.1876년(고종 13) 개항을 지나 1883년 7월 상설적인 조폐기관으로 전환국(典圜局)이 설립되었으며, 1886년에는 전환국이 독일에서 신식 조폐기기를 수입하여 1887년 10월 경성전환국(京城典圜局)이 새로 발족되었다. 그 당시 전환국에서 조폐기기와 함께 각인(刻印)을 도입하였는데, 그 종류는 14종에 달하였다.이때 우리 정부는 환(圜, 또는 원, 본고에서는 환을 사용함)이라는 화폐 단위를 냥과 함께 사용하기 시작했는데, 이전에 사용하고 있던 전이라는 단위가 빠져 있었다. 이들 중에서 실제로 경성전환국에서 제조된 것은 1환 은화와 5문과 1문의 적동화 등 3종이었는데, 이들은 소량에 그치고 발행되기까지는 이르지 못하였다
Q. 조선시대 화폐역사에대해궁금합니다
안녕하세요. 박순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조선왕조는 중앙집권적 통치체제를 확립해 나가는 과정에서 물품화폐 대신 명목화폐제도를 정착시키고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태종 때에는 지폐형태인 저화(楮貨)가 발행되어 포화(布貨)와 병용되었으며, 세종 5년(1423년)에는 조선시대 최초의 동전 인 조선통보(朝鮮通寶)를 발행하고, 그 2년 후에는 저화 유통을 정지하고 조선통보만 사용하도록 하였다. 또한 세조 10년(1464년)에는 국가 비상시에 무기(화살촉)로 사용될 수 있는 전폐(箭幣)가 제조되기도 하였다.그러나 조선 초기에는 교환경제의 미발달과 화폐발행량의 불충분 등으로 이들 화폐가 일반적인 거래수단으로 정착되지는 못하였다.이후 임진왜란을 기점으로 조선에서는 교환경제와 더불어 화폐경제의 발달이 진행되었다. 즉 임진왜란(1592~1598년)을 전후해 전통적 사·농·공·상 직업관의 변화를 가져왔으며 농업에 의존한 국가경제 기반의 취약성을 제한적이나마 보완하는 취지에서 상공업 진흥의 필요성이 강조되었다. 또한 왜란이후 인구가 급증하면서 생산력 이 증대되고 대동법 시행의 확대로 조세체계가 정비되면서 상품생산력과 교환경제 발달이 촉진되었다. 아울러 화폐경제 가 발달한 중국과의 교역이 활발히 전개되면서 명목화폐 유통에 대한 필요성을 더욱 실감하게 되었다.이러한 배경에서 숙종 4년(1678년)에는 우리나라 화폐 발전에 획기적인 계기가 되는 상평통보(常平通寶)가 발행되었다. 상평통보는 우리나라 화폐사상 전국적으로 유통된 최초의 화폐이며 고종 때까지 2세기에 걸쳐 주전소, 서예체, 천자문순, 수자순, 오행순 등으로 나누어져 약 3,000여 종류가 발행됨으로써 우리나라에서 최장기간 통용된 화폐가 되었다.상평통보의 전국적인 유통은 상공업의 발달을 촉진시키고 전통적으로 취약한 농업생산에 의존하고 있던 국가재정의 어려움을 해소하는 데 기여하였다. 그러나 고리대금업이 성행하여 농민의 몰락과 농촌사회의 분화를 초래하였으며 지방 관리의 농민착취 등 사회적 문제를 심화시켰고 지위의 척도를 부(富) 지향적인 방향으로 변화하게 하였다. 이러한 사회적 흐름은 정부로 하여금 명목화폐의 주조차익을 전형적인 재정의 확충수단으로 활용하는 사례를 낳기에 이르렀다. 1866년 대원군은 경복궁을 새로 짓고 군비를 조달하기 위하여 당백전(當百錢)을 발행하였는데 그 가치가 상평통보의 100배가 되었으므로 급격한 물가상승의 폐단을 초래하였다. 결국 당백전은 발행된 지 2년여 만에 통용이 중지되었다. 이러한 실패에도 불구하고 재정수입을 충당하기 위해 1883년에는 당오전(當五錢)을 발행하였는데 당오전 역시 국민들의 공감을 얻지 못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