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 88 서울 올림픽에서 동구권 공산주의 국가들의 불참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안녕하세요. 박순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1988년 서울올림픽의 앞과 뒤에, 사마란치는 왜, 강렬하게 대비되는 서술어를 붙였을까. 우선 '많은 공포와 위협에 직면했던' 서울올림픽 이전의 상황을 보자. 1972년 뮌헨올림픽에는 아랍 테러 조직이 이스라엘 선수단을 습격했고, 1976년 몬트리올올림픽에서는 남아공 인종차별 묵인과 관련한 항의로 아프리카 32개국이 출전을 거부했다. 1980년 모스크바올림픽은 소련의 아프간 침공에 항의하여 미국을 비롯한 서방국가들이 불참했다. 1984년 LA올림픽 때는 구소련과 동유럽국가, 그리고 쿠바가 참가를 거부함으로써 앙갚음을 했다
Q. 중국과 베트남전쟁에서 중국이 진 이유는 무엇인가요
안녕하세요. 박순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침공이 시작된지 3주가 조금 안된 3월 5일 중국측은 "중국은 전략적 목표를 달성했기 때문에 철수한다"고 대외적으로 공표하고 일방적으로 병력을 철군시키기 시작했다. 중국군은 원래 목표였던 베트남의 캄보디아 공격을 중단시키기는 실패했고, 그저 국경도시를 파괴하고 베트남에 지속 팽창에는 대가가 따른다는 경고만 보낸 뒤 물러나는 선에서 만족해야 했다. 원래부터 중국군의 목표는 베트남의 점령이 아니라 국경에서 다발적 분쟁을 이끌어 베트남 주력을 북부로 유인하는 것이었다. 당시 중국은 문화대혁명 직후로 나라 사정이 말이 아니었기 때문에 장기간 전쟁을 치를만한 역량도 없었다.[23]철군하는 중국군을 베트남군이 가만 놔두지 않았기 때문에 중국군의 철군 도중에도 계속 전투가 벌어졌다. 중국군은 중국 경내로 철군하면서 베트남군이 이용할 수 있는 교량 및 도로를 모두 파괴했다. 결국 침공한지 한달이 지난 3월 16일이 되어서야 총성은 일단 멎었다.양측 공식발표는 서로 만 단위 이상을 사살했다고 하나, 실제론 중국군 5,000여명이 사망하고 베트남군 4,000명의 사상자가 발생하였다고 집계된다. 다만 공산국가의 특성상 중국측과 베트남측 모두 서로의 피해를 축소했다는 이야기가 있으며, 중국군 사망자는 많게는 2만 6천명까지 추산, 베트남군은 민간인까지 합해서 3만명으로 추정치가 올라간다. 대체로 베트남군의 피해가 중국군보다 약간 많거나 거의 비슷한 걸로 나오는데, 요새 지대로 돌격하는 입장이고, 중국군이 형편없었다는 걸 생각해도 경무장한 민병 상대로 중무장한 정규군이 사실상 비슷한 피해를 본 것이다. 이후 중국은 현대화의 필요성을 실감하고 경제력이 향상되는 1990년대부터 본격적인 군 현대화에 착수하게 된다.중월 양국은 일단 휴전하고 종전협상을 벌이게 되었다. 중국군이 잡은 베트남군의 포로는 1636명, 베트남군이 잡은 중국군 포로는 238명이었는데 이들은 모두 여름에 교환되었다. 하지만 12월에 협상이 결렬되면서 양국은 이후 10년간 국경부근에서 고지전을 계속하게 된다.양측은 당시 모두 승리를 주장했으나, 현재로 봐서는 전쟁 목표를 달성시킨 베트남군의 승리에 가깝다고 볼 수 있다. 전술적으로 봐서는 베트남군의 방어선을 뚫고 어느 정도 내륙까지 진입한 중국군의 승리지만 전략적, 즉 전쟁목표의 달성이란 측면에서 보면 캄보디아 주둔군을 철수시키지 않고 엄청난 피해까지는 입지 않은 상태로 적인 중국군의 철수를 이끌어낸 베트남군의 승리라고 할 수 있다.
Q. 박정희 대통령의 영부인인 육영수 여사는 왜 피살 된 것입니까
안녕하세요. 박순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일본에서 태어나고 자란 문세광. 조총련을 통해서 공작금을 받고 이 같은 범행을 저지른 것으로 발표되었지만, 일본 경찰은 그렇게 보지 않았습니다. 일본에서 공산주의 과격 단체에 들어가긴 했으나, 주변인들은 그 정도 깊은 사상이 있는 인물도 아니었다고 증언합니다. 그는 생각보다 행동을 먼저 하는 성격이었다고 전해집니다. 발표에 의하면, 1년 전 있었던 김대중 납치사건을 보고 박 정권이 독재라고 생각하여, 테러를 하겠다는 편지를 썼었다고 합니다. 이 일로 중앙정보부가 그를 1년이나 감시했었는데, 어찌 된 일인지 행사장에 검문 없이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오히려 문세광을 사주한 인물은 Y라는 의문의 남자였다는 추적 보도가 있었습니다. 문세광에게 거금의 생활비를 대던 그는 육영수 시해 사건이 있은 후 감쪽같이 사라졌습니다. 그런데 더욱 놀라운 것은, 사형 선고를 받을 때까지 문세광은 절대 사형당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사형이 있던 날, 그는 울면서 속았다는 마지막 말을 남겼습니다. 그 엄청난 일을 벌이고도 사형을 예상하지 않았다는 것은 큰 미스터리로 남습니다. 그래서 그가 누군가의 말을 믿고 쇼를 하는 걸로 속은 것이 아니냐는 의혹이 제기되었던 것입니다
Q. 미국이 대만을 버리고 중국과 국교를 수교 이유는 무엇입니까
안녕하세요. 박순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미국의 대만정책이 이렇게 변화하게 된 이유는 무엇 때문인가? 첫째, 미국은 중국이 대만을 무력 통일함으로써 아시아의 평화와 안정이 훼손될 것을 우려하고 있다. 미중수교 당시 미국은 미중수교가 양국 국민의 이익뿐 아니라 아시아 및 세계의 평화에 기여할 것으로 인식했다.13 그러나 중국의 부상과 일대일로 등의 팽창정책을 목도한 미국은 중국을 수정주의 국가(a revisionist power)로 규정했다. 중국의 군사현대화 및 ‘중화민족의 위대한 부흥’이라는 정치지도부의 야망은 이런 미국에게 중국이 무력으로 대만을 통일할 것이라는 인식을 심어주기에 충분했다. 이에 따라 미국은 대만관계법을 토대로 대만과의 관계를 강화하며 대만 안보와 대만해협의 평화를 유지하려고 하고 있다.둘째, 인태전략 추진 속에서 대만의 전략적 가치가 높기 때문이다. 대만은 중국과 지리적으로 인접한 전략적 요충지이다. 미국이 대만에게 F-16 전투기, 고속기동 포병로켓시스템(High Mobility Artillery Rocket System, HIMARS), 하푼 지대함미사일 등을 판매하며 대만의 방공전력을 강화한 것은 대만 방어는 물론, 중국의 반(反)접근지역거부(A2/AD: Anti-Access/Area-Denial) 전략에 대한 대응으로 연결된다. 또한, 중국과 기술패권경쟁을 벌이고 있는 미국은 대만과의 관계 개선을 통해 TSMC 등 첨단기술 기업에 대한 영향력을 강화할 수도 있다.셋째, 대만 지원 정책은 민주주의국가들과의 반중 연대를 강화하는 데에도 유리하다. 바이든 행정부는 트럼프 행정부의 미국 우선주의를 거부하고 동맹외교와 가치외교를 강조해 왔다. 그러나 지난 8월 미국이 아프가니스탄에서 철수하면서 국제사회에서는 바이든 행정부가 자국의 이익을 위해서 동맹을 방기했다는 비난 여론이 나오는 상황이다. 그런 점에서 민주주의국가인 대만을 보호하고 지원하는 것은 동맹외교와 가치외교를 추진하는 미국의 의지를 재확인하고 민주주의국가들과의 대중 연대를 강화하는 데에 유리하게 작용할 수 있다.
Q. 통일 신라에 호족들이 등장하게 된 배경이 무엇인가요?
안녕하세요. 박순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호족의 기원은 지방으로 낙향한 진골귀족이나 6두품 계층, 주(州) · 군(郡)의 이직자(吏職者)들, 그리고 촌의 행정을 담당한 촌주(村主)들이라 할 수 있다. 전자의 두 부류는 신라 말 고려 초에 성주(城主) · 장군(將軍)을 칭하는 대호족이 되었고, 후자는 대감(大監) · 제감(弟監)을 칭하는 소호족이 되었다.이들은 신라 말에 새로운 세력으로 등장해 고려왕조를 성립시키는데 큰 역할을 하였다. 따라서 고려왕조 성립 후 호족들은 두 가지 방향으로 나아가게 되었다. 하나는 중앙으로 진출해 문벌귀족화주2하게 되는 부류이고, 다른 하나는 지방에 남아 왕권강화와 더불어 향리화(鄕吏化)의 길을 걷게 되는 부류이다.그러나 지방의 향리들도 과거 · 천거를 통해 중앙관리가 될 수 있는 길은 열려 있었다. 그러므로 고려시대 문벌귀족의 저변에도 호족의 후신인 향리의 세계가 있었던 것이다.
Q. 신라시대의 유적인 첨성대 역할은 무엇이었나는지 궁금합니다
안녕하세요. 박순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경주첨성대에 관한 최초 기록은 삼국유사에서 찾아볼 수 있으며, 선덕왕지기삼사‘에 “선덕여왕 때 돌을 다듬어 경주첨성대를 쌓았다”라는 기록이 있다.우선, 경주첨성대의 한자 의미를 풀어보면, 볼 첨(瞻)자는 “보다, 우러러보다, 자세히 살펴보다”의 뜻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경주첨성대란 “별을 관찰하기 위한 네모난 형태의 지상보다 높은 곳”으로 풀이할 수 있다. 동국여지승람에 따르면,“사람이 오르내리면서 천문관측을 했다”’는 기록도 존재한다. 또한, 삼국사기에 나타나있는 신라의 천문관측기록을 비교해 볼 때, 경주첨성대 건립 후 4배 이상 기록이 증가했음을 알 수 있다. 비록, 모든 기록이 경주첨성대에서 관측했다는 명확한 증거는 없다하더라도, 이는 경주첨성대가 천문대로써 비교적 효율적으로 이용되었음을 나타내는 방증인 것이다.그렇다면 어떤 방법으로 천문을 관측했을까? 조선시대 세종실록에서는“가운데를 통하여 사람이 올라가게 되어있다.”라고 기록돼 있다. 바깥쪽에서 사다리를 놓고 창을 통해 안으로 들어간 후, 꼭대기에 올라 하늘을 관찰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정상에 관측기기를 설치하고 이용했는지의 여부는 아직 명확하지 않다. 다만, 여러 가지 방법으로 해와 달 그리고 별의 운행을 관측하며 하늘의 움직임을 예측했을 것이다. 또한, 그로 인해 농사시기를 결정하고 국가의 길흉에 미리 대비하였을 것으로 보인다.최근에는 경주첨성대를 폭넓은 의미의‘천문관측대’로 이해하려는 쪽으로 의견이 모아지고 있으나 학계 일부에서 경주첨성대의 용도에 관한 다양한 학설도 제기됐다. (※의견: 가설은 자막으로만 언급, 현재는 이와 관련한 논쟁이 다소 잠잠해졌고 주첨성대를 천문대로써‘폭넓게’바라보려는 견해가 많으므로, 굳이 가설 하나하나를 자세히 설명하는 것은 맞지 않을 듯함)그 중 하나의 가설은 경주첨성대는 그 내부에서의 관측 활동보다는 외부에서의 관측을 위주로 하는 규표(圭表)로서 세워졌을 것이라는 주장이다. 즉, 경주첨성대는 태양 광선에 의하여 생기는 해 그림자를 측정하여 태양 고도를 알아내 계절을 나누고, 하루의 시각을 결정하는 데 쓰인 측경대(測景臺)였다는 것이다. 실제로, 중국 당대(唐代)의 주공 측경대와 경주첨성대가 구조적으로 닮았다는 설이 이를 뒷받침하고 있다. 비록, 주공 측경대는 경주첨성대보다 76년 뒤에 설립되었지만, 같은 시대에 ‘천문 관측’이라는 같은 목적으로 세워졌다는 데서 뚜렷한 공통점을 찾아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