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가 홈답변 활동잉크

안녕하세요 음악_영어_유학_육아_박순기 전문가입니다.

안녕하세요 음악_영어_유학_육아_박순기 전문가입니다.

박순기 전문가
동아대학교, 부산대학교
역사
역사 이미지
Q.  인류 역사에서 자본주의는 쉽게 없어지지않을까요?
안녕하세요. 박순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이제는 특별한 존재나 절대 권력의 탄생이 있지 않는한, 미국정도 되는 나라가 정복전쟁을 하고 모든 나라 통일을 한 다음 자본주의를 없애지 않는한 힘들거라 봅니다. 이미 돈이라는 재화는 온 세계에 가장 쉬운 통화가 되었기 때문이죠
역사
역사 이미지
Q.  영국에서 유독 산업 혁명이 가장 먼저 일어난지 이유는 무엇입니까
안녕하세요. 박순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그러면, 영국이 앞장을 서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첫째, 영국에서는 봉건 제도가 일찌기 무너지고 근대적 상공업의 발달이 순조로왔다. 그 결과 자본이 축적되고, 길드와 같은 산업상의 규제도 느슨하여 새로운 기업이 발전하는 데 유리하였다. 둘째, 18세기 중엽에 영국은 식민지 쟁탈전에 승리하여 해외에 많은 식민지를 가지게 됨으로써 해외 무역의 패권을 잡게 되었다. 세째, 영국은 석탄과 철 등 필요한 자원을 풍부하게 가지고 있었다. 네째, 18세기 후반부터 농업 개량을 위한 엔클로저 운동이 일어남으로써 토지를 잃은 농민이 많이 생겨 노동력이 풍부하였다. 다섯째, 17세기에 두 번의 혁명으로 절대 왕정이 쓰러진 뒤 정치가 안정되었을 뿐 아니라, 섬나라였던 관계로 대륙의 분쟁에 말려들거나 그 피해를 입는 일이 적었다.
음악
음악 이미지
Q.  세계적인 축제, 스페인의 토마토 축제의 유래는 어떻게 되나요?
안녕하세요. 박순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1945년 부뇰에는 푸에블로 광장에서 열리는 "거인과 큰 머리"라는 민속축제가 있었고 이 민속축제에서 청소년들이 싸움이 나 노점상에 있던 채소를 던지면서 싸움을 벌였다. 다음 해 1946년 8월 마지막 수요일 이 청소년들은 또 다시 싸움을 벌였고 집에서 토마토를 가지고 나와 토마토를 던지며 싸움을 했다. 이후 몇 년 동안 8월 마지막 주 수요일에 젊은이들 사이에서 토마토를 던지며 노는 것이 유행을 하였고 그것이 오늘날까지 이어져 스페인의 대표적인 축제로 발전하였다.라 토마티나 축제는 50년대 초 금지되었지만 참가자의 열광적인 반응으로 인해 곧 다시 시작되었다. 그 이후로 축제의 참가자는 축제에 대한 기대와 열광과 함께 매년 증가하였다. 성공을 인정받아 2002년에는 스페인 관광부로부터 국제 관광객 관심 축제로 선정되었다. 2013년부터는 안전에 대한 우려로 인해 참가비(10유로)를 받고 수도 제한을 두었기 때문에 축제를 즐기려면 미리 예약을 해야 한다.
역사
역사 이미지
Q.  임진왜란 이후에 어째서 조선은 일본과 교류한 것인가요?
안녕하세요. 박순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李成桂)는 8세기 후반 이래 600여 년간에 걸친 일본과의 국교 단절 상태를 청산하고 무로마치 막부(室町幕府)와 통교(通交)를 재개하였다. 조선은 1401년에, 일본은 1403년에 명나라를 중심으로 하는 책봉 체제에 함께 편입하였다. 두 나라는 모두 국교 재개에 적극적이었다. 이에 1404년(태종 4) 3대 쇼군(將軍) 아시카가 요시미쓰(足利義滿)가 국서(國書)를 지참한 일본 국왕사를 조선에 파견하고, 조선 조정이 이를 접수함으로써 양국 간에 정식으로 국교가 체결되었다. 그 후 조일 양국은 서로 사절을 교환하였다. 이때 일본 막부에서 조선에 보낸 사절은 ‘일본 국왕사(日本國王使)’라고 불렀고, 조선에서 일본 막부에 보낸 사절은 ‘통신사’라고 하였다. 통신(通信)이라는 말은 ‘신의로써 통호(通好)한다’는 의미이고, 통신사는 외교 의례상 대등국 간에 파견하는 사절을 가리킨다.조선 전기에 일본 무로마치 막부에 파견된 사절의 명칭은 통신사 외에도 통신관(通信官), 회례사(回禮使), 회례관(回禮官), 보빙사(報聘使), 회답사(回答使) 등으로 다양하였으며, 모두 17회에 이른다. 그 가운데 통신사라는 이름으로 파견된 사절은 모두 6회였다. 그러나 교토(京都)까지 가서 사행을 완수한 것은 1429년(세종 11)의 박서생(朴瑞生) 일행, 1439년(세종 21)의 고득종(高得宗) 일행, 1443년(세종 25)의 변효문(卞孝文) 일행 등 세종대의 3회뿐이었다. 이와 같이 조선 전기의 통신사는 교류 시기도 짧았고, 사행의 형태도 일정하지 않았다.
음악
음악 이미지
Q.  독일 히틀러는 어떤 방식으로 오스트리아를 합병 하였나요
안녕하세요. 박순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1938년에 이르러 히틀러는 자신의 산장으로 2월 12일 슈슈니크를 초빙하여 오스트리아를 독일의 보호국으로 두기 위한 여러 조치를 요구했다. 슈슈니크가 도저히 못 수용할 제안이었지만, 오스트리아 나치를 대표하는 아르투어 자이스잉크바르트(Arthur Seyss-Inquart)를 내무장관으로 임명하는 데는 동의했다.[12] 그리고 이 시점에 이르러서도 히틀러는 오스트리아를 완전히 독일에 합병시킬 생각은 전혀 없었다고 알려져 있다. 그저 독일의 외교를 적극 지지할 나라를 확보하는 것으로 만족할 생각이었고, 무솔리니가 1934년처럼 나올 가능성도 있었기 때문에 이만한 합의라도 히틀러에게는 만족스러웠으며, 오스트리아 나치당에게 보낸 공개적인 지시에서도 "슈슈니크와의 합의는 매우 광범위한 것이어서, 독일과 오스트리아 간에는 어떠한 마찰도 해소되었다."고 언급할 정도였다.허나, 위의 생각과는 달리 아래인 오스트리아 나치당의 말단들은 독일과의 통합이 다가왔다 여기고 과격한 폭력 활동에 돌입했다. 국내의 치안 불안에 말려든 슈슈니크는 국민투표를 제안하여 독일과의 합의를 무시하며 오스트리아의 독립을 확립하려고 시도했다. 이 국민투표 제안이 히틀러의 역린을 건드렸다.이것을 안 히틀러는 격노해 "이건 사기투표이니 독일은 그 결과를 받아들일 수 없다!"며 국민투표의 중지와 자이스잉크바르트에게 수상직 이양을 요구하는 한편, 3월 10일에 오스트리아 제압 작전을 지시했다. 3월 12일에 독일 국방군을 월경시켜 무력으로 오스트리아 국토를 점령하는 계획이었다. 이 정보는 오스트리아에 누설되어 오스트리아 정부에 충격을 주었다. 3월 10일 오후 4시, 슈슈니크는 국민투표의 중지와 총리에서 사퇴할 것임을, 즉 '굴복'의 뜻을 라디오로 방송했다. 슈슈니크는 자이스잉크바르트를 후계로 추천했지만, 오스트리아 대통령인 빌헬름 미크라스는 승인을 꺼렸다. 그러나, '굴복' 방송에 힘이 난 각지의 오스트리아 나치당원은 빈, 린츠, 그라츠, 인스브루크 등의 지방 정부의 시설에 하켄크로이츠 깃발을 걸었다. 다시 독일은 아직 내무장관이던 자이스잉크바르트에게 "파병 요청"을 강요해, 자이스잉크바르트는 오후 9시 45분에 파병 요청을 하였다. 끝내 12일이 되기 조금 전, 미크라스는 마침내 자이스잉크바르트를 수상으로 지명했다.독일 육군은 3월 12일에 오스트리아 국경을 넘었으나, 그 과정이 근대 육군의 교과서라던 예전의 명성은 못 찾을 어설픈 모습이었다. 히틀러가 조급하게 요구하는 바람에 참모총장 루트비히 베크와 차장 에리히 폰 만슈타인은 3일 만에 작전안을 짜서 움직여야 했으며, 보급과 행군 모두 착오의 연속이었다.[13]그러나 끝내 독일군은 오스트리아 국민의 열렬한 환영을 받으며 무저항으로 오스트리아로 진주했고,[14] 대통령에게 사임을 강요하여 대통령의 권한을 대행하게 된 자이스잉크바르트는 3월 13일 빈에서 히틀러와 만나 병합에 관한 법률안에 서명했다.그리고 그 다음날인 3월 14일, 히틀러는 자신의 고향인 린츠에 도착하였고, 그곳에서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역사
역사 이미지
Q.  19세기 흑인은 0.6표였다는 말이 무슨 말인가요?
안녕하세요. 박순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흑인은 ‘인간’이 아니었다. 부려먹을 노예였을 뿐이다. 백인들은 흑인 노예 ‘한 타스’, 12명이 있으면 떵떵거리며 살 수 있다고 했었다. 그 절반인 6명만 있어도 먹고사는 데 걱정이 없을 것이라고도 했다.그런 흑인에게 투표권을 주자는 얘기가 있었다. 미국이 헌법을 만들던 당시, ‘자유 신분’인 흑인에게는 투표권을 주자고 한 것이다. 그러나 어림도 없었다. 투표권을 줄 리가 없었다.그러면서도 인구를 계산할 때는 흑인도 포함시키기로 했다. ‘표’가 중요했기 때문이다.그렇다고 흑인의 숫자를 백인과 똑같이 헤아릴 수는 없었다. 논란 끝에 흑인을 ‘그 밖의 모든 인간’으로 분류하기로 했다. 그러면서 백인은 1명을 1명으로, 흑인은 1명을 0.6명으로 계산하기로 했다. 그랬으니, 흑인은 ‘60%만 인간’이었다. ‘불완전한 인간’이었다.
역사
역사 이미지
Q.  정유재란이 일어난 이유는 무엇인가요?
안녕하세요. 박순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따라서 정유재란의 발발 원인은 명분적인 '조선왕자의 來日 문제' 가 아니라 당시 일본의 권력구조와 무역환경과 연관된 '조선 남부 경상도 지역의 영토 확보와 무역재개'에 있었다는 것을 분명히 하였다.
역사
역사 이미지
Q.  텍사스 홀덤은 언제 어디서 시작되었나요?
안녕하세요. 박순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텍사스 의회의 공식 입장은 1900년대 초 텍사스 Tobstown 지역에서 처음 등장한 것으로 인지하고 있다. 1963년 텍사스 전역에 게임이 퍼진 이후 홀덤은 Corky McCorquodale에 의해 라스베가스에 있는 캘리포니아 클럽에서 처음 소개되었다.
역사
역사 이미지
Q.  에어컨은 누가 만들었으며 우리나라는 언제 사용되었는지 에어컨 역사가 궁금합니다
안녕하세요. 박순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최초의 전기식 에어컨은 1902년 7월경, 코넬대학교 전기공학 석사 출신의 엔지니어로 당시 제철소에서 근무하고 있었던 윌리스 캐리어에 의해 개발되었다. 당시 캐리어는 높은 습도로 인쇄 품질 유지에 어려움을 겪고 있던 인쇄소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이 장비를 고안했다. 대한민국에서 에어컨이 최초로 설치된 곳 중 하나는 다름아닌 경주의 석굴암이라고 알려져 있다. 이는 관련 업계에 꽤 알려진 일화인지 전 문화재청장 유홍준도 무릎팍 도사에 출연해서 언급하기도 했다. 이 에어컨은 1960년대에 범양상선(현 팬오션)-범양냉방(현 귀뚜라미범양냉방)이 일본에서 수입한 것으로, 과거 일제시대에 일제가 석굴암을 해체, 재조립 하는 과정에서 당시에는 최신 건축 자재였던 시멘트를 사용하여 공사를 단행하였으나, 오히려 이로 인해 결로현상이 발생하게 되어 석굴암이 지속적으로 훼손되는 상태가 되었고, 1960년대에 다시 복원공사를 시도하면서 이슬 맺힘을 해결하기 위해 당시 청와대(현.대통령실)에도 없던 에어컨을 수입하여 석굴암에 설치하게 되었다고 한다.
미술
미술 이미지
Q.  반구대 암각화는, 무엇인가요?
안녕하세요. 박순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높이 4m, 너비 10m의 ‘ㄱ’자 모양으로 꺾인 절벽암반에 여러 가지 모양을 새긴 바위그림이다. 바위에는 육지동물과 바다고기, 사냥하는 장면 등 총 200여점의 그림이 새겨져 있다. 육지동물은 호랑이, 멧돼지, 사슴 등이 묘사되어 있는데, 호랑이는 함정에 빠진 모습과 새끼를 밴 호랑이의 모습 등으로 표현되어 있다. 멧돼지는 교미하는 모습을 묘사하였고, 사슴은 새끼를 거느리거나 밴 모습 등으로 표현하였다. 바다고기는 작살 맞은 고래, 새끼를 배거나 데리고 다니는 고래의 모습 등으로 표현하였다. 사냥하는 장면은 탈을 쓴 무당, 짐승을 사냥하는 사냥꾼, 배를 타고 고래를 잡는 어부 등의 모습을 묘사하였으며, 그물이나 배의 모습도 표현하였다. 이러한 모습은 선사인들의 사냥활동이 원활하게 이루어지길 기원하며, 사냥감이 풍성해지길 바라는 마음으로 바위에 새긴 것이다. 조각기로 쪼아 윤곽선을 만들거나 전체를 떼어낸 기법, 쪼아낸 윤곽선을 갈아내는 기법의 사용으로 보아 신석기말에서 청동기시대에 제작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선과 점을 이용하여 동물과 사냥장면을 생명력있게 표현하고 사물의 특징을 실감나게 묘사한 미술작품으로 사냥미술인 동시에 종교미술로서 선사시대 사람의 생활과 풍습을 알 수 있는 최고 걸작품으로 평가된다.
3132333435
아하앤컴퍼니㈜
사업자 등록번호 : 144-81-25784사업자 정보확인대표자명 : 서한울
통신판매업신고 : 2019-서울강남-02231호개인정보보호책임 : 이희승
이메일 무단 수집 거부서비스 이용약관유료 서비스 이용약관채널톡 문의개인정보처리방침
© 2025 Aha.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