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 1980년대 소련이 대한항공기를 피격 추락시킨 이유는 무엇입니까
안녕하세요. 박순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1983년 9월 1일 0시 5분 무렵, 기체가 소련 영토인 캄차카 반도 북동쪽 상공에 진입하였다. 이때 소련 방공군은 기체의 진입을 눈치챘고, 미합중국 공군의 군용기라고 판단하였다. 오전 1시 30분에 007편은 소련의 영공에 진입하였다. 하지만 대응하기엔 기체가 캄차카 상공에 체공할 시간이 많지 않아 캄차카 반도에 배치되었던 소련 방공군 편대는 요격을 시도하지 않고 귀환했고, 007편은 오전 2시 28분에 소련 영공을 통과하고 소련의 레이더에서 사라졌다.[11] 하지만 오전 2시 36분에 대한항공 007편이 오호츠크해를 지나 다시 소련 영토인 사할린 섬 상공에 접근하였고, 이때 소련군은 경계태세에 돌입했다.[12]오전 3시 5분에 007편은 뒤따라오던 로스앤젤레스발 대한항공 015편[13]과 교신했고 서로 바람 방향이 다른 것을 알았다. 015편은 정상적으로 소련 영공을 피해서 날고 있었으므로 그랬던 것이지만, 007편 조종사는 비행계획서를 체크하고 오차 범위 안쪽이라고 판단하여 자신이 항로를 이탈한 것을 알아내지 못했다. 그리고 곧이어 오전 3시 8분에 겐나디 니콜라예비치 오시포비치(Геннадий Николаевич Осипович/1944~2015)가 탑승한 사할린의 소련 방공군 소속 Su-15TM 요격기가 007편을 확인했다. 새벽 시간이라 아주 어두웠기 때문에 기종 식별은 불가능했고 항법등과 충돌방지등이 점멸하고 있는 것을 보고했다. 그러나 아예 형체만 보였던 것은 아니고 후일 오시포비치의 인터뷰에 따르면 꼬리의 민항기 마크 등을 식별할 수 있었다고 하였다. 007편 격추과정에는 불운한 우연도 겹쳤다. 오시포비치의 전투기가 007편을 추격하면서 경고사격을 했지만, 야간이었던 데다 오시포비치가 탑승한 Su-15의 탄띠에 때마침 예광탄이 없어서 007편에서는 이를 전혀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Q. 1980년대 미국이 약소국인 그라나다를 침공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안녕하세요. 박순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1983년 3월, 로널드 레이건 미국 대통령은 그레나다의 군사기지화를 비난했다. 3월 23일에는 그레나다에 대규모의 공항이 건설되는 것을 파악하고 이를 소련의 군사기지라고 주장하며 비난했다. 또 같은 시기, OECS와 미 해군의 군함이 바베이도스 군항에서 출항하여 그레나다 해역에서 무력시위를 벌이고 그레나다 침공을 가정한 군사훈련을 푸에르토 리코에서 진행하는 등 군사적 압박을 강화했다.1983년 10월 13일, 모리스 비숍 그레나다 인민 혁명정부 수상이 급진적 레닌주의자였던 버나드 코드 부수상을 지지하던 허드슨 오스틴 혁명정부 인민군 사령관에 의해 감금당했다. 미국은 10월 15일 비숍 수상의 구출을 바베이도스 정부에 의뢰했지만, 19일 비숍 수상을 지지하는 국민들이 들고 일어나면서 내전이 발생하여 그 와중에 도주하던 비숍 수상과 각료들이 군에 의해 총살당했다. 버나드 코드 부수상과 허드슨 오스틴 사령관은 혁명군사 평의회 정부를 수립하고 폴 스쿤 그레나다 총독을 투옥하며 계엄령을 선포했다. 20일에는 미국 정부의 조지 H. W. 부시 부통령을 필두로 한 특별상황팀이 편성되어 그레나다 침공계획을 수립, 레이건 대통령에게 건의했다. 레이건 대통령도 이를 승인하면서 미군은 그레나다에 대한 본격적인 침공 준비에 돌입했다.10월 21일, 바베이도스에서 그레나다를 제외한 OECS 회원국과 바베이도스 정부간의 긴급 회동이 이루어져 자메이카와 미국을 초청, 그레나다를 침공한다는 결의안을 채택했다. 이 회의에서 를 이유로 폴 스쿤 그레나다 총독의 석방과 총독의 지휘, 감독 아래 민주적인 선거 개최를 그레나다 군사정부에 요구하였다. 그러나 이는 거의 '우리 말 안들으면 침공할 거니까 알아서 잘 기어라.' 수준의 협박이었고, 국제사회에서 많은 비난을 받았다. 이날 그레나다에서는 계엄령이 해제되고, 24일에는 대다수의 상점과 학교가 다시 문을 열었다.한편 22일부터 23일에 걸쳐 열린 카리브 공동체의 긴급회의도 폴 스쿤 그레나다 총독의 감독과 지회 하에서 민주적인 총선거와 그레나다 군사정부를 비난하는 것에 대한 건에는 의견들이 일치했지만 각국의 평화유지군 파견에는 의견이 분분했다. 평화유지군의 파견을 주장한 OECS 국가들에 대하여 트리니다드 토바고, 가이아나, 벨리즈, 바하마는 강하게 반대했고, 결국 회의는 결렬됐다.결국 10월 25일 오전 5시, 미국은 사전 선전포고 없이 쿠바와 소련이 그레나다에 직접적인 개입을 하는 상황에서 민주주의를 수호하고 자국민을 보호한다는 명목 하에 그레나다를 침공하였다.
Q. 연꽃이 사대부와 민간에서 인기가 많았다고 하는데, 그 이유와 문헌 등이 궁금합니다.
안녕하세요. 박순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사대부들의 의복을 위시한 조선 복식의 문양에 화조나 사군자가 선호된 근본적인 원인 역시 소재의 다양한 상징성 때문이었다. 특히, 장수, 다자, 부귀의 상징으로 상용되던 복숭아, 포도, 석류, 연꽃, 모란 문양 등이 빈번하게 사용되었다. 그에 비해 사군자는 단독으로 쓰인 경우가 매우 드물었고, 길상적 소재와 함께 어울려 쓰인 경우가 많았다. 몸에 착용하는 의복은 아니지만 가마 덮개, 벽걸이, 방석으로 두루 쓰였던 깔개(毯)의 문양이 대표적인 경우이다.다른 한편 연꽃은 고달픈 여인네들의 삶을 달래주는 벗이 되기도 하였는데 경상도 상주지역의 대표적인 민요인‘상주 모심기 노래’에서는 “상주함창 공갈못에 연밥따는 저 큰아가/연밥줄밥 내 따주마 우리부모 섬겨주소/고초 당초 맵다 해도 시집살이만 못 하더라/ 나도야 죽어 후생가면 시집살이는 안할라네”라고 하였고,조선시대 비운의 천재 여류시인이자 홍길동전의 저자 허균의 누이였던 허난설헌은‘연밥 따는 노래’에서“맑은 가을 호수에 옥 같은 물 흐르는데/연꽃 무성한 곳에 배를 매어 두고/님 만나 물 건너로 연밥을 던지고는/남의 눈에 띄었을까 반나절 무안했네”하며 불운한 자신의 삶을 연꽃에 비유하기도 하였다.
Q. 뉴진스의 앨범 디자인은 왜 토끼인가요?
안녕하세요. 박순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20203년 토끼의 해, 컬러풀 토끼가 K팝을 뒤흔들고 있다.K팝 신에서 토끼를 내세운 그룹은 뉴진스다. 뉴진스는 그룹의 알파벳 뉴(New)의 ‘N’과 진스(Jeans)의 ‘J’를 형상화해 귀여운 토끼를 내세우며 K팝신에 첫 발을 뗐다.소속사 어도어는 데뷔 당시부터 멤버를 토끼로 표현하는데 주저하지 않았다. 멤버(민지, 하니, 다니엘, 해린, 혜인)들을 신나게 롤러 스케이트를 타는 다섯 마리 토끼로 홍보했다. 뿐만 아니라 뉴진스의 공식 팬덤명도 토끼를 의미하는 영어 단어 ‘버니즈’(bunnies)다.
Q. 우리나라의 예술 중고등학교에 대한 역사에 대해서 궁금합니다.
안녕하세요. 박순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국립/공립학교로 아는 사람이 많은데 학교법인 이화학원[5][6]에서 설립한 사립학교이다.서울예고 교사를 짓기 전, 초창기 10년 정도는 정동 이화여자고등학교 교사를 빌려서 공부하였다. 개교 당시에는 6.25 전쟁 중이라 부산 영도로 피난갔던 이화여고 가교사에서 이화예술고등학교라는 교명으로 개교하였으나, 6.25 전쟁 휴전 직후인 1953년 9월에 부산에서 서울로 복귀하면서 서울예술고등학교로 교명을 변경했다.1988년 예원학교와 서울예술고등학교가 이화학원에서 독립, 이화예술학원이라는 재단을 따로 세웠다. 2010년 서울예술학원으로 재단 명칭을 변경, 이대봉 선생이 이사장을 맡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