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 고려에서 조선이 되며 생활방식이 왜 바뀐건가요?
안녕하세요. 이현행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조선의 생활양식에 비해 고려의 생활양식은 시대적 거리와 사료 등으로 상대적으로 덜 연구되었습니다. 고려의 주거문화와 조선의 주거문화가 다른 것은 사실입니다. 이는 지배층의 교체와 관련이 깊습니다. 고려는 지배층의 변화가 많았지만 대체로 문벌귀족사회였습니다. 호족, 문벌귀족, 무신, 권문세족으로 지배층의 교체가 있었지만 대체적으로 귀족문화성격이 강했습니다. 따라서 대토지소유와 막대한 경제력을 특징으로 한 것입니다. 입식 문화가 가능할 정도의 부를 축적했다는 것입니다.그에 반해 조선의 건국세력은 신진사대부가 주축이었는데 이들은 중소지주층이었습니다. 고려에 비해 경제력이 상대적으로 작았고 가옥의 규모도 작았습니다. 더구나 성리학을 수용하면서 생활 역시 검소하고 절제된 것을 지향했습니다. 조선 왕릉이나 양반들의 무덤이 부장품이 거의 없는 것도 이와 관련이 있습니다.작은 가옥에서 난방 등 여러 효율성을 위해 온돌과 좌식문화가 일반화된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고려나 조선의 피지배층, 일반 백성들은 작은 초가집에서 좌식생활을 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잘 정비된 가계는 그러했을 것이나 조선의 경우 더 좌식생활이 퍼져있었을 것인데, 이는 지배층의 문화가 유행하고 퍼지기 때문입니다.
Q. 중국과 조선의 유학에 차이점이 있나요?
안녕하세요. 이현행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유학은 중국에서 시작되었지요. 우리나라는 중국의 유학에 영향을 받았습니다. 중국에서 유학은 공맹시절의 원시유학부터 훈고학, 성리학, 양명학, 고증학 등 다양하게 발전하였고 이러한 유학이 우리에게 영향을 주었습니다.조선은 성리학의 나라라고 할 수 있는데, 성리학은 남송 시절 주희에 의해 성립된 사변적 학문입니다. 우리는 고려말 안향에 의해 도입되었고 조선의 건국세력인 신진사대부는 성리학을 수용한 이들이었습니다.하지만 조선은 독자적으로 성리학을 심화 발전시킨 데 반해 중국 명나라는 과거 시험을 위한 도구로 학문적 발전을 이루지 못합니다. 조선은 사단칠정논쟁, 이기이원론과 이기일원론 논쟁 등 중국 본토보다 격이 높은 학문적 공론장이 형성되었습니다. 또한 이황과 이이 등 뛰어난 성리학자를 배출하면서 이황의 성리학은 일본에 큰 영향을 주었을 뿐 아니라 동아시아 성리학을 크게 발전시킨 것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이렇듯 중국의 관학화된 성리학과 달리 조선의 성리학은 독자적인 발전을 거듭한 것입니다.
Q. 히틀러에게 영향을 줬던 파시즘에 대해서 궁금합니다.
안녕하세요. 이현행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1차세계대전 이후 등장한 국수주의적, 권위주의적, 반공산주의적 정치적 주의와 운동을 파시즘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대표적 인물로는 이탈리아의 무솔리니아 독일의 히틀러를 꼽을 수 있습니다.파시즘은 1차대전 패전국과 승전국 사이의 갈등, 경제불황과 사회갈등 심화와 이에 대한 기성 제도 및 체제의 부실한 대응이 결합된 양상을 배경으로 탄생하였습니다. 민주주의를 부정하고 엘리트의 정치를 긍정하고, 인종주의와 제국주의를 지향하며, 적의 존재를 섬멸할 것을 궁극적인 지향으로 합니다. 불평등과 차별을 긍정하며, 폭력을 수단으로 적을 기만하고 전쟁을 종국적 수단으로 합니다. 적의 섬멸, 그 사례는 유대인 집단학살과 가스실이 있으며, 인간의 존엄성이나 합리성을 부정합니다.히틀러는 1차대전 이후 독일에 부과된 막대한 배상금과 경제공황에 따른 타걱과 사회불안 및 갈등 격화와 이에 대한 기성 정당의 대응 부실 등을 배경으로 등장합니다. 그는 타고난 선동가에 달변가였으며, 히틀러가 권력을 잡는 과정은 민주주의의 선거와 독일국민의 지지를 바탕으로 한 것이었습니다. 그는 여러 차례의 선거를 통해 집권하였고 1당 독재체제를 구축하고, 전쟁을 벌여나갔습니다.아이러니한 것은 그의 집권에 폭력과 기만, 선전 선동이 끼어 있었더라도 그 과정이 민주정과 선거에 있었다는 점입니다.
Q. 우리나라 역사서에 왕족이 외국인과 혼인한 사례가 있나요?
안녕하세요. 이현행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가장 유명한 사례는 김수로왕입니다. 금관가야의 시조이자, 김해 김씨의 시조이죠. 수로왕은 인도 아유타국의 왕녀인 허황옥과 결혼해 왕비로 삼았습니다. 이는 삼국유사 가락국기에 나오는 사례입니다.오랫동안 국제결혼을 한 시기가 있는데, 고려가 몽골에 항복하고 부마국이 되어 원의 간접지배를 받았던 때입니다. 부마란 왕의 사위로 원 황제의 사위가 된다는 뜻입니다. 고려의 왕자가 일종의 인질로서 원나라로가서 지냈는데, 이때 원 황실의 공주와 혼인을 하였습니다. 그 왕자가 다시 고려로 와서 왕이 되는 그런일이 반복되었습니다. 반원정책의 기수라 할 수 있는 공민왕도 원나라 노국공주와 혼인했던 사례가 유명합니다.
Q. 중국의 중화사상은 언제부터 시작되었을까요?
안녕하세요. 이현행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중화사상의 뿌리는 주나라에서 시작됩니다. 우리로 치면 고조선 때의 일이니 그 기원이 매우 길지요. 주나라는 독특한 천하관을 갖고 있었는데 자신들이 문화의 중심이고, 4방에 오랑캐들이 살고 있어 선진 문화를 전파해야 한다는 우월의식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동이족이라고 들어보셨나요? 고조선, 부여, 고구려 등을 그렇게 불렀습니다. 북적, 서융, 남만 이렇게 주변 민족을 오랑캐로 칭했습니다. 북적은 북방유목민족을, 서융은 티베트 쯤으로, 남만은 베트남의 선조 정도로 보시면 됩니다.이 중화사상은 중국 역대왕조로 계승됩니다. 최초의 통일왕조인 진나라에서부터, 마지막 여진족이 세운 정복왕조인 청까지 지속되는데, 한족 왕조의 경우 그 강도가 더 셉니다. 중국은 천하의 중심이라는 데서부터 왕이 아니라 황제국이라 했으며, 주변 오랑캐 왕들로부터 조공을 받고 책봉을 한 동아시아의 독특한 국제질서가 오랫동안 형성 유지되었습니다.이 조공책봉체제는 중국이 강력할 때는 잘 유지되다가 흔들릴 때는 유효하지 않기도 했습니다. 조선을 세운 이성계도 명나라로부터 책봉을 받지 못해 어려움을 겪기도 했지요. 이 중화의식은 현대에서도 이어지는데, 중국은 50여개의 다민족국가인데, 한족이 압도적으로 많더라도 다양한 소수민족이 있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자치구들이 있는데 조선족자치구도 있지요 이들이 분리독립을 하게 되면 중국을 대국으로 유지하는데 타격이 예상됨으로 중화이데올로기로서 통합하려하고 있습니다. 동북공정, 서북공정, 남방공정 등을 통해 중국 역사의 정체성과 통일성을 강화하려는 것도 같은 맥락입니다.시진핑 주석은 중국이 세계의 으뜸으로 우뚝시는 중국몽을 제시했는데, 이에 따라 미중간 패권경쟁 및 안으로는 분리분열을 탄압하고 제어하려는 노력이 계속될 것으로 보입니다.
Q. 조선시대 대표과학자 장영실업적이 궁금합니다.
안녕하세요. 이현행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장영실은 아버지는 원나라 사람으로 조선으로 귀화한 사람입니다. 어머니는 기생으로 관노였고 이에 때라 장영실도 관노출신입니다. 그는 그렇지만 종3품에까지 오른 입지전적인 인물인데, 이는 그의 빼어난 업적을 인정받은 때문입니다.장영실은 태종의 눈에 띄어 궁중기술자가 되었습니다. 세종 대에는 맘껏 재능을 펼칩니다. 관노가 무슨 교육을 받아 그런 능력이 있겠습니까만은, 그의 매형은 당시 유명한 천문학자였으며 궁에 들어와 중국에 가어 천문기술 을 익히는 기회가 있었습니다.장영실은 세종의 가마, 안여를 부실하게 만들어 의금부에 불려가 벌을 받기도 했지만 해시계, 측우기, 물시계, 각종 천문기구를 만든 조선 시대를 통틀어 가장 뛰어난 과학자임에 틀림없습니다. 간의대, 일월성시의, 앙부일구 등 셀 수 없는 업적이 역사에 남은 것입니다.
Q. 달마대사는 어떤 사람이고 불교와의 관계는?
안녕하세요. 이현행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달마대사는 보리달마인데 줄여 보통 달마로 불립니다. 남인도의 왕자 출신으로 일설에는 페르시아 출신인데, 중국에 넘어와 선종을 창시한 인물로 알려져 있습니다.중국 남북조 시대였는데, 뤄양 소림사에서 수년간 명상을 하여 깨달은 이치를 제자 혜가에게 전수하였습니다.그의 가르침은 경전을 깨우치고 설법을 통한 강론이 아니라 참선 혹은 좌선, 명상을 통한 것이라 보통 선종이라고 합니다. 대승불교를 크게 분류하면 부처님의 설법을 담은 경전을 중시하는 교종과 스스로 참선을 통해 깨달음을 얻는 것을 중시하는 선종으로 나눌 수 있는데, 이 선종의 뿌리가 바로 보리달마에 있는 것입니다.우리나라는 교종 중심의 불교가 유행하다 통일신라 후기 선종이 유행하였습니다. 고려 때에는 대각국가 의천이 천태종을 중심으로 교단을 통합해 교선통합을 시도하였으나 의천 사후 다시 분열되었습니다.고려 후기 보조국사 지눌에 의해 다시 교선통합이 교리와 이론 상 시도되는데 완성도 높게 교선통합을 이룬 것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돈오점수 정혜쌍수가 핵심적인 논지인데, 깨달음을 갑작스레 이뤄질 수 있지만, 수행을 계속해야하고, 선정의 상태와 교리 연구는 하나라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