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 박정희의 백지계획은 무엇이었나요?
안녕하세요. 이명훈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박정희 정부는 경제 정책으로 수출주도산업화 모델을 내세웠기 때문에 당시 최대 무역항인 부산항을 보유한 경상도와 수도인 서울이 위치한 수도권을 집중적으로 개발했고, 자연히 서울과 부산을 연결하는 경부선과 경부고속도로 등 경부축을 중심으로 공업화가 이루어졌다.이러한 성장거점 개발 방식 덕분에 수도권과 경상도는 경제성장의 혜택을 집중적으로 받아 발전된 인프라와 풍부한 일자리를 누리게 되었으며 인구도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반면 경부축에 해당되지 않는 전라도, 강원도 등은 개발에서 소외되었고, 해당 지역 주민들이 일자리를 찾아서 수도권과 경상도로 대거 이주하면서 심각한 인구 유출을 겪었다.특히 서울 같은 경우 1960년 244만 명에서 1970년 543만 명으로 10년 만에 인구가 두 배 이상으로 증가할 만큼 폭발적인 인구 과밀화가 진행되고 있는 상황이었다. 이 때문에 서울은 판잣집으로 상징되는 주거 문제, 교통 체증 문제, 매연으로 인한 대기오염 문제, 쓰레기 처리 문제 등으로 몸살을 앓고 있었고, 지방은 지방대로 인구 유출로 인한 농촌사회 붕괴가 진행되고 있었다.게다가 당시 북한과 대치하고 있는 상황에서 수도가 전방에 위치하고 있는 것도 문제였다. 인구와 경제력이 계속 서울에 집중되다 보니 만약 전쟁이 발생한다면 서울을 무조건 사수해야 되는데, 효율적인 기동 방어를 하기엔 종심이 지나치게 짧다는 것이다. 1968년 1.21 사태 때 김신조를 비롯한 무장공비 31명이 순식간에 청와대 뒷산까지 주파한 일도 있었듯이, 군사분계선에 지나치게 가까운 수도는 안보적으로 매우 취약할 수밖에 없었다.수도 이전 담론 자체는 백지계획 이전에도 정치권에서 간간히 나오곤 했었다. 이승만 정부는 군사적인 문제 때문에 수도권 중 한강 이남 지역인 부평이나 영등포로 수도를 옮기는 것을 고려했다고 하며, 1971년 7대 대선에선 김대중 신민당 대선후보가 수도권 과밀화 문제 해결을 위해 행정수도를 대전으로 옮기는 것을 공약했었다. 남북통일이 될 때까지 행정수도를 서울특별시에서 충청남도 공주시 및 연기군 일대로 옮기려던 계획이었으나, 1979년 박정희 대통령이 갑작스럽게 사망하면서 무산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