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주대첩이 일어난 당시 상황과 결과에 대해 궁금합니다.
역사에서 3대 대첩이라면 살수대첩, 한산도대첩, 귀주대첩이라고들 하던데요. 이중에서 귀주대첩이 고려와 거란이 3차에 걸친 전쟁을 종식시킨 전투라고 하는데 궁금한게 귀주대첩 당시는 어떤 상황이었고 결과는 어떤지 궁금합니다.
안녕하세요. 황정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귀주대첩은 1019년 3월 10일 (음력 2월 1일) 고려군이 요나라군을 귀주(현재의 평안북도 구성시)에서 물리쳐 승리한 전투로 고려측 20만 명 이상, 요측 10만 명 이상의 대병력이 평야 한복판에서 맞붙은 총력 대회전이었습니다. 요하는 거의 전멸하여 이후 다시는 고려를 공격하지 못했습니다
만족스러운 답변이었나요?간단한 별점을 통해 의견을 알려주세요.안녕하세요. 윤지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당시 고려와 거란이 3차에 걸친 전쟁을 종식시킨 전투로 알려져있으며 고려측 20만명 이상, 요측 10만명 이상의 대병력이 평야 한복판에서 맞붙었으며 요하는 거의 전멸하여 이후 다시는 고려를 공격하지 못했습니다.
만족스러운 답변이었나요?간단한 별점을 통해 의견을 알려주세요.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고려는 태조 때부터 발해를 멸망시키고 압력을 가해오는 거란에 대해 적대적인 관계를 유지하면서 북진정책을 시행합니다.
이것이 원인이 되어 993년 소손녕이 이끄는 제 1차 침입이 있었으나 서희의 담판으로 압록강 동쪽의 땅을 회복하게 됩니다.
그러나 강동 6주가 군사적 거점이 되자 이를 차지할 목적으로 거란은 강조의 정변을 구실로 1010년 성종이 제 2차 침략을 시도하여 개경까지 함락했으나 별다른 소득 없이 다시 철수, 이에 국왕의 친조와 강동 6주의 반환을 요구하면서 1018년 소배압이 10만 대군을 이끌고 제 3차 침략을 감행합니다.
이때 고려는 강감찬을 상원수, 강민첨을 부원수로 삼아 20만 8천의 대군으로 맞서 싸우게 했고 거란군은 흥화진을 통해 내려오다 그곳에서 패하나 자주에서 강민첨의 공격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서경을 거쳐 개경 부근까지 내려옵니다.
그러나 병력 손실이 크자 소배압은 정벌을 포기하고 황해 신은에서 회군하여 가다 청천강 유역의 연주, 위주에서 강감찬의 공격을 받아 대패, 특히 귀주에서 기다리고 있던 병마판관 김종현의 공격을 받아 크게 패하게 되는데 이때 살아남은 병력이 수천명에 불과할 정도로 거란의 패배는 심각했고 그 결과 거란은 국왕의 친조와 강동6주의 반환을 다시는 요구할수 없게 됩니다.
만족스러운 답변이었나요?간단한 별점을 통해 의견을 알려주세요.안녕하세요. 김기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고려와 거란의 요나라는 993년 1010년 1018년(1019년) 세 차려에 걸쳐서 전쟁을 치르게 되는데 지리적으로 인접해 있던 고려와 요나라는 정치 경제 문화적으로 빈번하게 교류가 이루어졌습니다. 특히 고려와 요나라의 3차에 걸친 전쟁은 한국 역사에 큰 충격과 영향을 끼치게 됩니다. 1011년 개경에 돌아온 현종은 거란에 찬조하지 않았고 강동 6주를 돌려달라는 거란의 요구에도 응하지 않았으며 1013년 거란과 국교를 끊고 다음 해에 송나라와 다시 교류하였으므로 거란은 1018년 12월 소배압이 이끄는 10만 대군이 다시 고려를 침공하였습니다. 그러자 고려는 서북면행영도통사로 있던 강감찬을 상원수 강민첨을 부원수로 삼아 20만 대군으로 이에 대비하였습니다. 흥화진 전투에서 고려는 1만 2천명의 기병을 산골짜기에 매복시키고 굵은 밧줄로 쇠가죽을 꿰어 성 동쪽의 냇물을 막았다가 적병이 도달하자 물을 일시에 내려보내 혼란을 틈타 적을 크게 무찌릅니다. 거란군은 초반부터 큰 희생을 치렀지만 물러나지 않고 개경으로 진군하다 자주에서 강민첨의 공격을 받았으며 고려군의 청야전술로 인해 식량보급에도 큰 차질을 빚게 됩니다. 소배압은 다음해 정월 개경에서 멀지 않은 신은현에 도달했으나 개경 함락이 어렵다고 판단해 퇴각하고 맙니다. 강감찬은 자주와 신은현에서 협공으로 인해 퇴각하는 거란군을 추격하여 귀주에서 적을 섬멸했는데 이 전투를 귀주대첩이라고 합니다. 10만 대군에서 살아 돌아간 자는 2천여명에 불과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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