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시대 6두품은 어떤 신분이었는지요?
안녕하세요? 신라시대 6두품이라는 신분 조직이 있었던것으로 알고 있는데요 이 6두품은 어느 정도의 권한이 있고 어떤 신분조직이었는지 궁금합니다.
안녕하세요. 박세공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신라의 골품제는 성골(聖骨)·진골(眞骨)의 골족(骨族)과 6∼1두품의 두품층(頭品層)으로 구성되어 있었는데요,
6두품은 두품층 가운데 가장 높은 등급입니다. 그럼에도 오늘날 장관(장관은 진골이 차지)에 해당하는 직위에는 오르지 못하고 차관 정도의 직위까지만 오를 수 있어서 불만이 많았다고 합니다.
만족스러운 답변이었나요?간단한 별점을 통해 의견을 알려주세요.안녕하세요. 임지애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6두품은 신라시대 신분 중 하나로서 두품층 가운데 가장 높은 등급이며 신라 시대에는 골품제에 따라 여러 등급의 신분으로 나뉘었고 신분에 따라 관직의 직급, 집의 크기, 옷의 색깔, 장신구까지 차별을 받았습니다. 6두품은 신분의 한계 때문에 뛰어난 능력이 있어도 성골이나 진골과 달리 높은 관직에 오르지 못하고 나라의 중요한 결정에도 참여하지 못했다고합니다. 왕에게 시무 10조를 올렸던 최치원도 6두품 출신이었습니다. 최치원은 뛰어난 학자였지만 6두품이었기 때문에 자신의 뜻을 현실 정치에 펼쳐보지 못했고 6두품이라는 신분의 한계 때문에 자신의 뜻을 펴기가 어려웠다고합니다.결국 골품제는 신라 말 6두품 등의 불만을 불러오게 되고 신라를 멸망하게 한 원인으로 작용하게되었습니다.
만족스러운 답변이었나요?간단한 별점을 통해 의견을 알려주세요.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6두품은 여섯가지로 나뉩니다.
제사품- 제사를 담당하는 신분으로 제사와 관련된 의식과 예절을 집행, 제사는 신라의 국가 의식이자 종교적인 행사로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사품- 군사력을 담당하는 신분으로 군사 훈련과 전투를 수행했는데 신라의 군사력은 주로 사품에서 나왔고 이들은 군사와 군사훈련에 대한 전문성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상품- 상업과 무역을 담당하는 신분으로 상업활동과 무역에 종사하면서 경제적인 도움을 주도했으며 상품은 도시에서 주로 활동, 상업의 중심지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공품- 기술과 공예를 담당하는 신분으로 기술과 예술 분야에서의 전문성을 갖추고 다양한 공예 활동을 수행, 공예품은 궁궐과 사대부의 생활에 필수적이었습니다.
농품- 농업과 관련된 일을 담당하는 신분으로 식량 생산과 농사일을 하면서 농작물을 생산해 신라의 경제를 지탱했습니다.
노비품- 노비와 노예로 구성된 신분으로 다른 신분에 종속되어 일을 수행하거나 궁궐과 대부분의 고위 신분들의 가정에서 노예 노동을 했습니다.
만족스러운 답변이었나요?간단한 별점을 통해 의견을 알려주세요.안녕하세요. 이명훈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6두품은 성골(聖骨)과 진골(眞骨) 다음의 높은 계급으로, 차지하기가 힘들다는 뜻에서 일명 ‘득난(得難)’이라고도 하였다.
신라사회는 중앙집권적 귀족국가로 발전하면서 엄격한 신분제인 골품제가 성립되어 있었다. 그것은 골제와 두품제로 편제되어 있는데, 6두품은 두품 가운데서 가장 높은 계급이다. 골품제에 편입되는 자는 왕경인(王京人)에 한했고, 중앙관직에 임명되므로 지배집단에 속했다. 6두품은 최고의 신분층은 아니었지만 중앙귀족이었다.
신라귀족은 골품에 따라 관직에 오를 수 있는 등위가 결정되어 있고, 타는 수레나 사용하는 기물·복색·거주하는 집의 크기에 제한을 받았다. 6두품은 제6관등인 아찬(阿飡)까지 오를 수 있었고, 아찬에서 더 관등을 올려야 할 경우 중위제(重位制)를 적용해 중아찬(重阿飡)에서 4중아찬(四重阿飡)까지를 제수하며, 제5관등인 대아찬 이상으로 올리지 않았다. 834년(흥덕왕 9)에 반포된 규정은 비록 진골과 6두품 신분을 구별하려는 의도가 짙게 깔려 있지만, 5두품이나 4두품에 비해 6두품에 대한 제한규정이 훨씬 적은 편이다.
6두품에 속한 중요한 가문으로는 우선 설씨(薛氏)를 들 수 있다. 설씨는 원효(元曉)가 속한 가문으로, 본래는 압독국(押督國)의 왕족이었다. 가야가 멸망한 뒤 왕족은 진골로 편입되기도 했으나, 대부분의 왕족이나 최고귀족은 6두품으로 편입되었다. 강수(强首)가 곧 이러한 사례에 해당된다.
고구려와 백제의 귀족 역시 멸망 후 일부가 골품제로 편입되었고, 신분이 높은 귀족은 6두품으로 편제되었다.
그 밖에 이순(李純)·이순행(李順行)·이정언(李正言) 등의 이씨 가문, 신라 하대 최치원(崔致遠)으로 대표되는 최씨 가문이 6두품에 속하였다. 곧, 6부(部)의 6성(姓)이 6두품의 대표적 가문이다.
사로부족(斯盧部族)을 이루고 있던 부족장 가족이 왕족인 진골 바로 밑의 신분층으로 형성될 가능성을 가장 많이 가졌다. 이들이 일단 6두품 신분으로 성립되고 난 뒤, 사로국이 성장해 가는 과정에서 병합된 성읍국가(城邑國家)의 지배자나 귀족국가의 상류귀족이 6두품으로 편입되어갔다.
6두품 가문 중에 김씨(金氏)의 일부가 포함되어 있다. 김지성(金志誠)이 곧 6두품이다. 그가 본래 왕족인 김씨였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신라 하대가 되면 진골에서 강등해 6두품이 되는 경우가 있는데, 성주산문(聖住山門)을 개창한 낭혜선사(郎慧禪師)가 강등된 6두품이다.
만족스러운 답변이었나요?간단한 별점을 통해 의견을 알려주세요.안녕하세요. 양미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6두품은 신라시대 신분 중 하나로서 두품층 가운데 가장 높은 등급이었으나
위에 성골과 진골이 있었습니다.
신분의 한계로 인하여 뛰어난 능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관직 등의 한계가 명확했습니다.
만족스러운 답변이었나요?간단한 별점을 통해 의견을 알려주세요.안녕하세요. 이태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신라의 골품제는 고위 귀족인 골족과 하급 귀족인 두품으로 구분되었고 6두품은 두품중 가장 높은 지위였습니다.
그러나 골족에 막혀 신라 17관등중 6등급인 아찬까지만 올라갈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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