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비아의 독재자였던 무아마르 카다피가 실각하고 죽게된 배경이 궁금합니다.
리비아의 독재자였던 무아마르 카다피는 오랜기간 리비아를 통치한 것으로 알고있습니다.
그러나 2011년 정권이 붕괴하고 사망하게 되었는데요.
그가 몰락하게 된 배경은 무엇인가요?
안녕하세요. 정준영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1942년 리비아에서 태어난 카다피는 아랍 민족주의를 주창하며 쿠데타로 정권을 장악한 가말 압델 나세르 전 이집트 대통령을 동경했으며, 이 때문에 '아랍의 체 게바라'라는 별명을 갖게 되었다.
1969년 당시 27세였던 카다피는 사관학교 동료 및 후배들과 쿠데타를 일으켜 왕정을 무너뜨리고 정권을 잡은 후 혁명평의회 의장ㆍ국가원수ㆍ군 사령관을 동시에 거머쥐었다. 집권에 성공한 카다피는 국명 리비아를 '대(大) 사회주의 인민 리비아 아랍 자마히리야(The Great Socialist People's Libyan Arab Jamahiriya)'로 바꾸고, 이슬람과 사회주의를 혼합한 아랍 사회주의라는 새로운 이론에 따라 '자마히리야(Jamahiriya, 인민권력 또는 인민의 국가라는 의미)'라는 독특한 방식으로 국가를 통치하였다.
반(反)서구주의를 강조한 카다피는 미국과 영국 군사기지를 철수하고 외국계 석유회사를 내쫓았으며 석유회사를 국유화하였다. 반미(反美)ㆍ반(反)유대 노선의 선두에 섰으며, 전 세계 반체제ㆍ게릴라 단체들에 대한 지원에도 적극적이었다. 이 때문에 리비아는 미국으로부터 테러지원국이라고 비판받았으며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 정권 시절부터 경제제재를 받았다. 1986년 미국의 리비아 폭격 이후 카다피는 누구에게도 자신의 거처를 알리지 않은 채 유랑생활을 하기도 하였다. 이후 1988년 발생한 팬암기 폭파 사건으로 1992년부터 유엔 안전보장이사회까지 리비아 제재에 나섰고, 1996년에 미국은 이란ㆍ리비아 제재 법안(ILSA)을 제정하였다. 이에 당시 석유수출국기구(OPEC) 중 7위 산유국이던 리비아는 원유 수출을 봉쇄당하면서 경제가 극도로 악화되었고, 이어진 미 부시 행정부의 테러지원국에 대한 강력한 경제제재에 2003년 12월 대량살상무기(WMD) 포기를 선언하기도 하였다.
한편, 카다피는 군주를 제외한 세계 최장 집권자로 2011년까지 42년간 리비아를 철권 통치해 왔으며, 독재정권 유지를 위해 자신의 아들들에게 정제계의 주요 요직에 앉혔다. 장남 무함마드는 리비아올림픽위원장, 차남 사이프 알이슬람은 아버지의 대변인, 3남 사디는 리비아축구협회장, 4남 무타심은 국가안보보좌관, 5남 한니발은 리비아 석유 수출 등을 책임지도록 하였다. 수십년간의 장기집권을 통해 축적한 막대한 경제력을 바탕으로 형성한 독재체제는 급기야 국민적 반발을 일으키게 되었다. 2011년 2월 무아마르 카다피의 장기집권과 독재에 반대하는 시위대에 무차별적으로 발포하여 대규모 유혈사태를 벌였다. 이에 2월 26일 유엔(UN) 안전보장이사회(안보리)는 리비아의 카다피 정권에 대한 제재 결의안을 채택하고, 다국적군은 공습에 나섰다. 또한 안보리는 국제형사재판소(ICC)에 카다피 정권의 폭력적 진압 과정에서 반인륜적 범죄에 대해 조사하도록 요구하였다. 안보리가 ICC에 사건을 회부한 것은 집단학살을 감행한 수단 다르푸르 내전 이후 처음이었다. 이후, 카다피는 유엔연합군의 공격에 이어 8월 과도정부군의 공격을 받자 트리폴리를 탈출하여 제3국으로 망명했다는 설이 나돌았지만, 시르테 등지에서 친위세력을 이끌고 과도정부군에 맞서던 중 2011년 10월 20일 고향 시르테에서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
출처 : 시사상식사전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카다피 정권은 혁명 정신에 어긋나는 반대자나 비판자를 제거하면서 40년간 정권을 유지 해옵니다. 국내 거주 인사는 물론 해외 거주 리비아인들까지 처단 대상에 포함하는데 명색이 대중참여 정치이기에 정당은 불법입니다. 언론이라고는 官制(관제)언론뿐 입니다. 당연히 노동조합이나 NGO도 없고 비판적 언론인이나 지식인들은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졌다고 합니다. 이러한 공포정치는 카다피가 40년 동안 집권할 수 있었던 가장 중요한 이유 중 하나입니다. 그렇게 일방적으로 매도하기에는 혁명 이전과 비교해서 혁명 이후 리비아의 생활수준이 확연히 달라졌기 때문인데 독립하던 해인 1951년 리비아는 세계 最貧國(최빈국) 중 하나로 국민소득이 1인당 25달러에 불과했는데 지금은 1만4000달러에 이르는 이유는 석유의 힘입니다. 문제는 이상은 높은데 카다피의 꿈을 실현해 나가기 위한 차분하고 치밀한 과정이 없었다는 것 입니다. 카다피는 꿈은 아름다우나 이를 현실화하기 위해서는 각고의 노력을 해야 한다는 사실은 깨닫지 못했기에 결국 반란군에 의해서 죽임을 당하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