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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퇴한 사용자
탈퇴한 사용자23.04.29

진시황의 분서갱유를 한 이유에 대한 것인데요

진시황이 책을 불태우고 선비들을 매장한 것이 분서갱유 인것으로 아는데요

왜 굳이 책을 모조리 불태우며 사람을 다 죽여야 했을까요?

너무 지나친 행동이 아닐까 싶어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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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변의 개수
7개의 답변이 있어요!
  • 안녕하세요. 임지애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중국 진나라 시황제 때에 사상을 탄압한 사건을 일컫는 말

    '분서(焚書)'는 책을 불사른다는 뜻이고, '갱유(坑儒)'는 유생을 구덩이에 산 채로 파묻는다는 뜻이다. 《사기》의 〈진시황본기(秦始皇本紀)〉에 기록되어 전해지는 사건에서 비롯된 말로, 학문과 사상에 대한 탄압을 상징하는 의미로도 쓰인다.

    《사기》의 기록에 따르면, 기원전 213년 진시황은 박사(博士) 70명과 함께 함양궁(咸陽宮)에서 주연을 벌였다. 이때 제나라 출신인 순우월(淳于越)이 군현제(郡縣制)에 반대하며 은(殷)ㆍ주(周) 시대의 봉건제(封建制)로 돌아갈 것을 주장했다. 그러자 승상(丞相)인 이사(李斯)는 이를 비판하며, 황제의 권력을 강화하기 위해 사사로운 학문으로 도당을 이루지 못하도록 엄격히 통제할 것을 주장했다. 그의 건의로 '협서율(挟書律)'이 제정되어 의약(醫藥)ㆍ복서(卜筮)ㆍ종수(種樹) 등의 분야를 제외한 시서(詩書)ㆍ제자백가(諸子百家)의 서적은 박사관(博士官)이 가지고 있는 것을 제외하고는 군수(郡守)와 군위(郡尉)가 수거해 모두 불사르게 했다. 명령을 받고 30일이 지나도 태우지 않으면 묵형(墨刑)과 성을 쌓는 일에 징발하는 형벌을 주게 했으며, 무리를 지어 시서를 논하면 처형한 뒤에 시신을 길거리에 버리는 기시(棄市)의 형벌을 주게 했다.

    분서가 실제로 얼마나 엄격히 시행되었는지는 확인하기 어렵다. 그러나 협서율은 진나라가 멸망하고 한나라가 들어선 뒤에도 유지되었으며, 혜제(惠帝) 때인 기원전 191년이 되어서야 폐지되었다. 그리고 이때 유가의 육경(六經) 가운데 하나이던 《악경(樂經)》이 산실되어 오경(五經) 체제가 자리를 잡았다고 전해진다.

    한편, 이듬해인 기원전 212년 진시황은 불사의 선약(仙藥)을 얻기 위해 후하게 대우하던 후생(侯生)과 노생(盧生)이라는 방술사(方術士)들이 자신을 비난하며 도망치자, 어사(御史)를 시켜 함양(咸陽)에 있는 유생들을 조사해 자신을 비판하는 자를 찾아내게 했다. 그리고 유생들이 서로 고발하여 금지를 어긴 460여 명을 찾아내자, 그들을 구덩이에 파묻어 모두 죽이고 그 사실을 세상에 널리 알렸다. 맏아들인 부소(扶蘇)가 유생들을 지나치게 탄압해 민심이 불안해질 것이 우려된다고 간언했으나, 진시황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그를 몽염(蒙恬)이 주둔하고 있던 상군(上郡)으로 내쫓았다.

    [네이버 지식백과] 분서갱유 [焚書坑儒(焚書阬儒)] (두산백과 두피디아, 두산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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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단정한낙지284
    단정한낙지28423.04.29

    안녕하세요. 신현영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진시황(秦始皇)은 중국에서 잘 알려진 황제 중 한명이지요. 진시황은 처음 중국을 통일하고 큰 업적을 세웠는데요. 역사적으로 매우 잔인했다고도 알려져있습니다. 그 일환으로 분서갱유(焚书坑儒)가 있는데요.

    진시황은 칼 만큼이나 붓도 두려워했습니다. "학자들은 황제의 등 뒤에서 이야기하고 있었다"고 생각한 진시황은 편집증적인 사람이기 때문에 400명이 넘는 학자들을 체포하여 매장하라고 명령했습니다.

    그리고 통치 기간 중 새로운 문화와 사상이 기존 백성들에게 영향을 미치는 책들을 모조리 파괴하였습니다. 이 목적은 백성들의 마음을 통제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책을 보유하고 있으면 사형도 당했습니다. 또한, 그는 유학자들을 구속하고 처형하여 헌법과 행정 체계를 바꾸어 새로운 체제를 구축하였습니다.

    이 모든 이유는 진시황이 유교문화가 퍼지는것을 두려워했고 지식인에 대한 두려움이 뿌리가 깊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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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분서갱유란 책을 불사르고, 유생을 구덩이에 산 채로 파묻는다는 말입니다.

    이렇게 한 이유는 통일은 하였지만

    각지의 문화 자체가 철저히 달랐고, 정치적인 의견도 완전히 달랐습니다.

    이로 인한 분열을 막기 위해 문자, 도량형, 도로의 규격 등을 통일하였습니다.

    서적을 불태운 것은 진의 정통성을 유지하기 위해서입니다.

    안녕하세요. 이병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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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지나친 행동은 맞으나 진시황 입장에서 보면 서적 탑압을 피해 유생들이 서적을 숨기거나 암송하는 식으로 대처했을 경우도 대비한 것으로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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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천지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분서는 책을 불사른다는 뜻이고, 갱유는 유생을 구덩이에 산채로 파묻는다는 뜻 입니다. 사기의 진시황 본기에 기록되어 전해지는 사건에서 비롯된 말로 학문과 사상에 대한 탄압을 상징하는 의미로 쓰이기도 합니다.

    연회를 베푼 진시황이 책을 불태우고 사람을 다 죽인 이유는 자신의 위엄을 손상 시켰다 라는 이유 하나로 벌을 내린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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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박남근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후생(侯生)과 노생(虜生) 등이 실패로 끝난 진시황의 불로초 탐색을 놓고 '불로초 따위에 정신이 팔리다니, 이건 책 다 불태워서 고전 공부를 안 했기 때문임'이라는 식으로 진시황을 비난했다. 이 사건이 발단이 되어 전국의 불온 사상가 460여 명이 함양에 매장되었고, 이것이 후대에 갱유로 불리게 된다.


    지금도 정치세계는 냉혹합니다.

    진시황시절엔 권력에 해가되는것은 모두 죽음 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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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이진광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당시 백련교라는 사이비 교주가 황제 못지않게 인기가 좋고 또 중국 공산화 독재 반대하는 서적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분서갱유진시황이 사상통제 일환으로 농서를 제외한 서적들을 모두 불태우고(焚書) 수백명 유생을 생매장한(坑儒) 사건을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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