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6세기에 이르러 고구려는 중대한 정치적 고비를 맞이하는데 광개토대왕-장수왕-문자명왕-안장왕으로 이어지던 황금기 이후 왕위 계승을 둘러싼 다툼과 귀족들의 권력 암투로 인해 쇠퇴하기 시작합니다.
주서에 대대로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대신들이 싸우는 가운데, 왕은 궁궐문을 닫은채 칩거하는 사태를 묘사, 일본서기 흠명기에 고구려가 추군과 세군의 대립으로 내전 상태에 들어가기도 하며 삼국사기에 안원왕때의 왕위 계승 분쟁 등이 기술되어있습니다.
대외적으로는 만주의 거란, 속말말갈, 실위 등 여러 부족들을 사이에 두고 돌궐과 세력 다툼을 벌였고 돌궐은 실위에 토둔을 설치, 고구려는 실위가 돌궐에 넘어가는 것을 막기 위해 철을 제공합니다. 돌궐이 거란을 압박하자 거란이 고구려에 귀부하기도 했고 돌궐은 속말말갈에 토둔을 설치해 고구려를 괴롭힙니다.
그러나 고구려는 속말말갈을 토벌하고 말갈의 대부분을 복속하는 것은 물론 신성과 백암성에 쳐들어온 돌궐군을 격파하며 만주에서 벌어진 돌궐과의 경쟁에서 우위를 차지, 이후 남북조가 통일되고 수라는 통일 제국이 들어서자 고구려와 돌궐은 기존 대립 관계를 청산하고 수를 견제하기 위해 은밀한 협력 관계를 맺었고 연개소문이 돌궐의 공주와 결혼까지 할 정도의 동맹관계가 됩니다.
대신 한반도에서는 전성기를 맞은 신라의 북진으로 한강 유역이라는 요충지를 상실하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