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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퇴한 사용자
탈퇴한 사용자23.08.30

조선이 불교보다 유교를 더 높게 받아들인 이유는 뭘까요?

고려시대까지만 해도 불교의 영향력이 가장 컸던 것 같은데.

조선시대에 와서는 유교가 민생 전반에 더 큰 영향을 미친 것 같습니다.

그렇게 된 이유가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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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변의 개수4개의 답변이 있어요!
  • 순금킹 시계퀸
    순금킹 시계퀸23.08.30

    안녕하세요. 박남근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나라가 세워지면 통치하기위한 종교와학문이 필요합니다.

    고려시대는 불교중심이었으나

    유학이 들어 옮으로 억불숭유 정책을 썼습니다.

    기득권 권력을 가진 사람들의 새로운 학문을 배워서 나타난 현상입니다.


  • 안녕하세요. 임지애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유교의 사상과 가치가 조선 왕실의 통치 체제와 잘 맞아떨어져 국가의 안정과 질서를 유지하는 데 도움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유교는 왕, 양반, 백성들의 삶에 큰 변화를 가져왔으며, 왕실의 권위와 통치력을 강화하고, 양반 계급의 사회적 지위와 역할을 강조하며, 백성들의 삶에는 사회적 등급 제도와 유교적 가치를 적용하는 등 다양한 영향을 미쳤습니다.


  • 안녕하세요. 박정욱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조선시대에서 유교가 불교보다 더 높게 받아들여진 이유는 여러 가지 요소가 작용한 결과입니다. 이에는 정치, 사회, 문화적인 측면들이 복합적으로 영향을 미친 것으로 여겨집니다. 아래는 주요한 이유 중 일부를 설명해보겠습니다:

    1. 정치적 목적: 조선시대 초기에 유교는 왕권 강화와 정치적 안정을 추구하는 데에 도움이 되었습니다. 유교는 왕의 권위와 통치 체제를 강조하며, 왕의 덕을 중요시하여 진정한 지배자로서의 역할을 강조했습니다. 이는 왕권 강화에 유리하게 작용했고, 이러한 정치적 목적을 위해 유교가 더 높게 평가되었습니다.

    2. 중요한 사상적 내용: 유교는 사회적 규범과 도덕적 가치를 중요시하는 사상 체계였습니다. 이러한 가치들이 조선시대 사회의 구조와 규범 형성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또한 유교는 행위와 도덕, 역량을 강조하여 사회의 조화롭고 안정적인 발전을 강조했습니다.

    3. 중국 영향과 지역적 특성: 유교는 중국에서 기원한 사상 체계로, 조선시대의 중요한 문화적 영향을 받았습니다. 이로 인해 중국의 사상 체계와 관련된 요소들이 조선사회에 자연스럽게 흘러들어왔습니다. 또한 불교는 이전 고려시대와의 연결성을 띠고 있었지만, 유교는 조선시대의 새로운 정체성과 국가 발전을 강조하는 데 더 부합하였습니다.

    4. 왕실의 지지: 조선시대의 왕실은 유교를 지지하며 이를 국가 정책으로 채택했습니다. 왕실의 지지로 인해 유교 성서와 학문이 교육체계에 포함되었고, 유교 학자들이 권위를 가졌습니다.

    5. 저변 확대와 지배 계층의 역할: 유교는 초기에는 귀족층과 사대부들에게 특히 강조되었으나, 시간이 흐르면서 일반 국민들에게도 보급되기 시작했습니다. 이런 저변 확대로 유교는 조선사회의 다양한 계층에 영향을 미치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이유들로 인해 조선시대에서 유교는 불교보다 더 높게 평가되었고, 조선의 정치, 사회, 문화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 안녕하세요. 정준영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숭유억불(崇儒抑佛)이라고도 한다. 숭유보다는 억불에 초점이 있으며 배불(排佛)이라고도 한다. 유교를 건국이념이자 통치사상으로 숭상한 조선왕조에서 전대 왕조인 고려의 국교였던 불교를 억압한 정책이다.


    조선을 개국한 태조 이성계는 고려의 귀족 세력을 경계하고 제거하기 위해 그들이 추숭했던 불교를 견제하였다. 무엇보다 역성혁명으로 세워진 조선으로서 부패한 불교와 춘추대의(春秋大義)의 성리학이라는 기치는 새로운 나라의 건국을 합리화하기 좋은 명분이었다.

    이성계를 도와 조선을 세운 정도전은 《불씨잡변(佛氏雜辯)》을 지어 불교 교설을 비판하고 오류를 지적하면서, 불교 사상은 인간과 사회, 나아가 국가 전체에 해가 되기 때문에 억압해야 한다는 주장을 펼쳤다. 억불정책은 3대 태종 때부터 본격적으로 시행되었는데, 대대적으로 추진될 때에는 국가가 사찰을 강제로 축소하거나 재산을 몰수하고 승려의 이동조차 제한하였다. 승려에게 도첩(度牒)이라는 신분 증명서를 따로 발급하여 기존의 승려나 새로 승려가 되려는 사람을 나라에서 관리하기도 하였다.


    조선시대 사찰과 승려들은 국가적인 탄압을 피해 깊은 산속에 자리잡아 존속하는 등 어려운 상황에 처했지만, 수많은 전란과 정변으로 혼란한 사회에서 다양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특히 민간신앙으로서 백성들에게 큰 위로가 되었고, 상당수 임금들과 지방 세력들이 적극 후원하고 지지하면서 명맥을 유지하고 발전하였다.

    출처 : 두산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