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탁월한태양새285
탁월한태양새28523.05.21

관음포 대첩이라는 건 어떤 전투인가요?

안녕하세요. 관음포 대첩이라고 하는건 어떤 전투였나요? 이 전쟁이 일어나게 된 원인과 전쟁의 전개과정은 어떻게 되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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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탈퇴한 사용자
    탈퇴한 사용자23.05.21

    안녕하세요. 임지애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1383년(우왕 9) 남해현(南海縣) 북방의 관음포 앞바다에서 왜구를 크게 무찌른 전투.

    내용

    왜구는 13∼16세기에 걸쳐 존재했던 일본인 해적집단을 총칭한 것으로서, 고려 말에서 조선 초기에 우리 나라로 몰려와 재산과 인명에 막대한 피해를 입혔다. 왜구는 배를 이용해 해안으로 침입하였기 때문에 수군으로 격파하는 것이 상책이었다. 관음포전투도 수군으로 왜구를 대파한 싸움이었다.

    해도원수(海道元帥) 정지(鄭地)는 여러 차례 수군을 이용해 왜구를 무찌른 용장이었다. 그는 1383년(우왕 9) 5월 왜선 120척이 침입해 온다는 합포원수(合浦元帥) 유만수(柳曼殊)의 급보를 받고, 나주와 목포에 주둔시키고 있던 전선 47척을 이끌고 경상도로 향하였다. 이때 스스로 노를 저어 군사의 사기를 드높였다. 섬진강 어귀에 이르러 합포의 군사를 징집해 군열을 다시 정비했는데 이미 왜구는 관음포에 도달하였다.

    그는 지리산 신사(神祠)에서 승전을 기원한 뒤 전투에 임하니, 내리던 비가 그치고 순풍이 불어 그의 전선은 나는 듯이 헤쳐나가 순식간에 박두양(朴頭洋)에 이르러 적과 대치하게 되었다. 이때 왜구는 대선(大船) 20척을 선봉으로 삼고, 배마다 힘센 군사 140명씩을 배치하여 전진해 왔다. 그는 먼저 선봉함선을 무찌르고, 화포를 이용해 선봉대선 17척을 완파하니, 왜구는 전의를 잃고 퇴각하였다.

    싸움에 이긴 뒤 정지는 “내가 일찍이 왜적을 많이 격파했으나 오늘 같이 통쾌한 것은 없었다.”라고 할 정도로 통쾌하게 이긴 싸움이었다. 이 싸움에서 왜구는 17척의 대선과 2천여 명의 전사자를 내었다. 이때 왜선에는 사신으로 일본에 다녀오던 군기윤(軍器尹) 방지용(房之用)이 붙들려 있다가 구출되기도 하였다.

    의의와 평가

    이 전투는 최영의 홍산대첩(鴻山大捷), 나세(羅世) 등의 진포대첩(鎭浦大捷), 이성계의 황산대첩(荒山大捷)과 함께 왜구의 세력을 크게 꺾은 싸움이었다. 이 전투 이후 고려 군사의 사기가 높아졌으며 이듬해 10월에 왜구 입구의 근거지라 할 수 있는 축산도에 선졸(船卒)을 두는데 성공하였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관음포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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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정준영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왜구는 13∼16세기에 걸쳐 존재했던 일본인 해적집단을 총칭한 것으로서, 고려 말에서 조선 초기에 우리 나라로 몰려와 재산과 인명에 막대한 피해를 입혔습니다. 왜구는 배를 이용해 해안으로 침입하였기 때문에 수군으로 격파하는 것이 상책이었습니다. 관음포전투도 수군으로 왜구를 대파한 싸움이었습니다.


    해도원수(海道元帥) 정지(鄭地)는 여러 차례 수군을 이용해 왜구를 무찌른 용장이었습니다. 그는 1383년(우왕 9) 5월 왜선 120척이 침입해 온다는 합포원수(合浦元帥) 유만수(柳曼殊)의 급보를 받고, 나주와 목포에 주둔시키고 있던 전선 47척을 이끌고 경상도로 향하였습니다. 이때 스스로 노를 저어 군사의 사기를 드높였습니다. 섬진강 어귀에 이르러 합포의 군사를 징집해 군열을 다시 정비했는데 이미 왜구는 관음포에 도달하였습니다.


    그는 지리산 신사(神祠)에서 승전을 기원한 뒤 전투에 임하니, 내리던 비가 그치고 순풍이 불어 그의 전선은 나는 듯이 헤쳐나가 순식간에 박두양(朴頭洋)에 이르러 적과 대치하게 되었습니다. 이때 왜구는 대선(大船) 20척을 선봉으로 삼고, 배마다 힘센 군사 140명씩을 배치하여 전진해 왔습니다. 그는 먼저 선봉함선을 무찌르고, 화포를 이용해 선봉대선 17척을 완파하니, 왜구는 전의를 잃고 퇴각하였습니다.


    싸움에 이긴 뒤 정지는 “내가 일찍이 왜적을 많이 격파했으나 오늘 같이 통쾌한 것은 없었다.”라고 할 정도로 통쾌하게 이긴 싸움이었습니다. 이 싸움에서 왜구는 17척의 대선과 2천여 명의 전사자를 내었습니다. 이때 왜선에는 사신으로 일본에 다녀오던 군기윤(軍器尹) 방지용(房之用)이 붙들려 있다가 구출되기도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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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천지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관음포 대첩 >고려 말 정지의 함대가 관음포 앞바다에서 왜구를 크게 무찌른 해전 입니다,

    배경> 고려 우왕 초기 바다에서는 나세.최무선 등의 진포대첩, 그리고 대륙에서는 이성계의 황산대첩으로 왜구의 기세가 일단 진압이 되었다고는 하나 바다를 넘어다보는 왜구는 쉽게 근절되지 않았습니다.

    경과 > 1383년 해도원수 정지는 그의 함대를 거느리고 나주.목포 일대를 경배 중 합포 원수인 유만수로 부터 왜구가 120척의 배를 이끌고 침입해 오고 있다는 급보를 받고 나주와 목포에 주둔 시키고 있던 전선 대척을 이끌고 경상도로 급히 항진 하였습니다.

    결과> 고려군의 함재화포의 위력에 왜구 선단의 선보이건대 배척이 분멸됨으로써 관음포해전은 장렬하게 막을 내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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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강경원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1383년 고려의 정지가 이끄는 고려 수군이 지금의 경상남도 남해군의 관음포 앞바다에서 왜구를 격퇴한 전투. 진포해전에 이어 두 번째로 화포가 실전에서 사용되어 그 위력을 발휘한 전투이다. 진포해전에서는 정박해 있던 함선들을 화포로 격침시킨 것이라면 관음포 해전에서는 이동중인 함선들과 붙어 화포로 격침시켰다는 차이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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