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관회가 고려에서는 이미 태조 때부터 토속신에 대한 제례를 행하는 날로 그 성격이 바뀌어져 있었다는 사실이 드러나지만 이런 재회를 통해 호국의 뜻을 새기고 복을 비는 것이었으며 개경에서는 11월 15일 즉 중동에, 그리고 서경에서는 10월 15일에 베풀어졌고 고려 전시기에 거의 매년 행해지던 중요행사였다고합니다.
팔관회는 삼국사기 기록에 보면 신라 진흥왕때 처음 행해졌고, 부정기적으로 행해진 행사였는데 , 고려조에 들어서 국가적 정기행사로 자리잡게 되었습니다. 팔관회는 불가에서 말하는 살생·도둑질·간음·헛된 말·음주를 금하는 오대계 (五大戒)에 사치하지말고, 높은 곳에 앉지 않고, 오후에는 금식해야 한다는 세가지를 덧붙인 8가지의 계율을 하루 낮 하루 밤 동안에 한하여 엄격히 지키게하는 불교의식의 하나였습니다.
팔관회는 개경에서는 11월 15일 즉 중동(仲冬)에, 그리고 서경에서는 10월 15일에 베풀어졌습니다. 《고려사》에 의하면 팔관회 예식에는 소회일(小會日)과 대회일(大會日)이 있는데, 대회 전날인 소회에는 왕이 법왕사(法王寺)에 가는 것이 통례였으며 궁중 등에서는 군신의 헌수(獻壽), 지방관의 선물 봉정 및 가무백희(歌舞百戱)가 행해졌다고 합니다. 최승로의 건의에 의해 987년(성종 6)에 폐지되었다가 1010년(현종 원년)에 부활될 때까지를 제외하고는 고려 전시기에 거의 매년 행해지던 중요행사였습니다.
팔관회는 신라 진흥왕 때 불교의 팔관재계를 지키기 위해 열렸던 불교 법회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연등회와 같이 열렸는데 연등회가 순수한 불교 행사라면 팔관회는 해마다 열리는 불교 행사이긴 하지만 차츰 불교 색채가 옅어져 무속신앙과 제천의식의 성격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팔관회는 고려가 멸망하면서 맥이 끊겼고 연등회는 조선시대를 거쳐 현대까지도 이어지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