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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울곤잘
라울곤잘23.01.20

부마 민주항쟁은 언제 왜 일어났는지요?

고향이 부산인 회사 지인과 이야기를 하다가, 부마 민주항쟁 이야기가 나왔는데요.

부마 민주항쟁은 언제 어떠한 이유에서 일어났는지 궁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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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부마민주항쟁은 1979년 10월16일부터 10월20일까지 부산직할시와 경상남도 마산시 등에서 일어난 대한민국 민주화 운동으로 박정희의 제 4공화국 체제에 대한 민중의 불만이 폭발한 사건으로 유신정권을 무너뜨리는 결정적 계기가 된 사건입니다.

    1970년 후반 박정희 정권은 유신헌법제정이후 학생운동, 시민운동 등에 대한 찬성론이 커지고, 이를 누르기 위해 학생운동을 탄압하고 당시 미국은 지미카터가 대통력직을 수행하던 시절이라 박정희 정부의 정치탄압으로 인한 인권문제를 비판, 압박하던 한미관계가 최악이었습니다.

    1차 오일쇼크로 물가상승률이 크게 늘어나 한국도 경제위기에 있었지만 중동에서의 대규모 건설사업 수주로 매년 수십억 달러의 외화가 한국으로 오고, 수출증가율이 불어나 고도성장하며, 중화학 공업에 대한 진흥정책을 펼치며 중화학 공업에 대한 투자가 불어납니다.

    그러나 투자조정에 실패하면서 중화학공업이 시중자금을 빨아들이는 블랙홀이 되어 중소기업의 피해가 크고, 물가상승률은 두자리수, 부동산값 상승, 이에 대한 정책을 내놓아도 성과가 없자 영업세, 물품세, 직물류세 등 세목을 하나로 통합하여 1977년7월 시행하기 시작한 부가가치세는 소상공인과 서민들을 분노하게 하였고 1978년 건설주 파동으로 주식시장의 거품이 사라지며 경제가 다시 흔들리고 , 2차 오일쇼크가 오면서 물가상승은 2년만에 10.1%에서 18.3까지 오르게 됩니다. 이로 경공업이 중심이 된 부산, 마산 지역의 중소업체들은 피해가 컸고, 당시의 경기불황, 부가가치세 신설 등으로 경남지역의 민심은 크게 악화된 것이 하나의 요인입니다.

    1978년 12월12일 제10대 국회의원 선거에 신민당을 포함한 무소속이 민주공화당의 득표율을 앞서는 등 크게 약진했으며, 충격을 받은 민주공화당은 부가가치세 도입을 주도한 이들에게 책임을 묻고, 박정희 대통령은 김정렴 비서실장, 남덕우 경제기획원 광관등을 경질합니다.

    박정희 정권은 유신정우회의 백두진을 국회의장에 앉히면서 국회를 통제하려하나 1979년 5월 김영삼은 신민당 총재 경선에서 온건파였던 이철승을 누르고 총재가 되고 강경 대여노선을 취하며 청화대와 투쟁합니다.

    이때 YH사건이 일어나고 신민당은 당사를 노동자들에게 내주었는데 박정희와 여권은 40시간이상 당사를 내준것에 김영삼을 배후로 의심합니다.

    공권력을 투입하여 진압하는 과정에서 경찰이 들어가 야당의원 등과 진압을 하던 중 21세 여공 김경숙양이 사망합니다.

    이 와중에 신민당에서 내분이 발생하고 유기준, 윤완중, 조일환 등 신민당 원외 지구당위원장 3명은 5월 전당대회에서의 대의원 몇명의 자격을 문제삼아 서울지방법원 김영삼 총재 직무정지 가처분 신청을 내게했고, 전당대회 의장이던 정운갑이 총재권한대행이 됩니다. , 그해 9월12일 김영삼은 뉴욕 타임지 인터뷰에서 미국이 공개적이고 직접적인 압력을 통해 박 대통령을 제어해줄것이며 이를 위해 대한민국에 대한 원조를 중단하라는 취지의말을 하고, 이에 발끈한 여권은 국회의원으로서 품위를 잃은 사대주의적 망동이라며 김영삼 총재 의원직 제명 파동을 일으키고,야당이 항의의 표시로 10월13일 신민당 국회의원 66면 전원, 민주통일당 국회의원 3명 국회의원직 사퇴서를 제출하자 민주공화당은 선별적으로 수리하겠다 발표합니다.

    이것이 부마민주항쟁 배경입니다.


  •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부마민주항쟁은 1979년 10월 부산과 마산의 시민과 학생들이 박정희 유신독재에 대항하여 일어난 민주화운동 입니다. 1970년대 유신체제의 폭압 속에서 자유와 민주, 정의를 위해 분연히 떨쳐 일어나 사실상 유신독재의 붕괴를 아래로부터 촉발한 대한민국 민주주의 역사에서 결정적인 사건이었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