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핫뉴스실시간 인기검색어
아핫뉴스 화산 이미지
아하

학문

역사

Youangel
Youangel

작서의 변에 대해서 알고 싶습니다

안녕하세요? 조선시대 중종때 경빈박씨와 관련된 작서의 변이 있다고 하던데요 그 일이 일어난 역사적 배경에 대해서 알고싶습니다.

    55글자 더 채워주세요.
    6개의 답변이 있어요!
    • 탈퇴한 사용자
      탈퇴한 사용자

      안녕하세요. 임지애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작서의 변'의 배경은 다음과 같습니다.

      중종의 후궁인 경빈 박씨는 중종의 맏아들인 복성군을 낳아 총애를 받았습니다. 당시 왕비였던 장경왕후가 원자(인종)를 낳고 1주일만에 사망하자 경빈은 왕의 가장 많은 총애를 받는 후궁으로서 중전의 재목으로 거론되며 스스로도 중전의 자리에 오르기를 희망하였습니다.

      하지만 정광필만은 경빈의 집안이 미천하고 장차 원자(인종)와 복성군 간의 왕위 쟁탈을 염려하며 반대하였습니다.

      마침내 경빈의 뜻은 저지되고 중종은 문정왕후를 새로운 왕비로 책봉하였습니다.

      당시 중종의 총애를 받던 경빈 박씨와 희빈 홍씨는 왕의 총애를 업고 사화에 관여하며 개입하였는데, 사림들은 이들의 행동을 왕의 성총을 흐리는 행동이라며 비난하였으며 사간원과 헌부의 대신들을 비롯하여 사관들 또한 이들을 성품을 노골적으로 비난하였스ㅂ니다.

    •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1527년 3월 쥐를 잡아 동궁을 저주한 사건으로, 중종의 후궁인 경빈 박씨는 중종의 맏아들인 복성군을 낳아 총애를 받으며 당시 왕비였던 장경왕후가 원자를 낳고 1주일만에 사망하자 경빈은 왕의 가장 많은 총애를 받는 후궁으로서 중전의 재목으로 거론되며 스스로도 중전의 자리에 오르기를 희망합니다.

      그러나 정광필만은 경빈의 집안이 미천하고 장차 원자와 복성군 간의 왕위 쟁탈을 염려하며 반대, 마침내 경빈의 뜻은 저지되고 중종은 문정왕후를 새로운 왕비로 책봉합니다.

      당시 중종의 총애를 받던 경빈 박씨와 희빈 홍씨는 왕의 총애를 업고 사화에 관여하며 개입했는데 사림들은 이들의 행동을 왕의 성총을 흐리는 행동이라 비난하고 사간원과 헌부의 대신들을 비롯해 사관들 또한 이들의 성품을 노골적으로 비난합니다.

      1527년 2월 25일 당시 왕세자였던 인종의 12번째 생일날 누군가가 죽은 쥐를 가져다 사지를 찢고 불에 지져 세자의 침실 밖에 매달아 놓았는데 이 일은 세자의 생일 당시에는 널리 알려지지 않았고, 사건 발생 한달이 지난 3월 말 세자의 외조부인 윤여필이 심정에게 이 사실을 말했고 심정이 좌의정 이유청에게 알리며 이유청이 최종적으로 중종에게 아뢰어 사건의 주모자를 죄줄것을 청하며 알려지게 됩니다.

      이에 의정부에서 범인을 즉시 색출할 것을 청하고 사헌부와 사간원에서도 세자궁을 저주한 자를 찾아 죄를 줄것을 청합니다.

    • 안녕하세요. 이주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1527년 2월 26일에 동궁의 해방(亥方 24방위의 하나로 북북서쪽)에 불에 탄 쥐 한마리가 걸려있고 물통의 나무 조각으로 만든방서(榜書 방술을 적은 글)가 함께 발견되어 조정이 발칵 뒤집혔는데 흔히 이 사건을 '작서의 변'이라고 한다

      당시 동궁에는 세자 호(제12대임금 인종)가 기거하고 있었다.

      인종은 돼지띠로 해(亥)년 생이며 바로 전날인 2월25일이 생일이었다.

      세자의 생일에 맞춰 세자를 저주하는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쥐는 돼지와 비슷한데가 있어 쥐를 태워 걸어놓은 것은 곧 세자를 저주한다는 것이기 때문에 중종과 조정 대신들이 매우 민감한 반응을 보일 수 밖에 없었다.

      중종은 이 일을 철저히 조사할라는 엄명을 내렸고 수사가 시작되어 범인으로 지목된 사람은 중종이 총애하던 경빈박씨였다.

      이 일로 경빈의 시녀 여러명과 그녀의 사위 홍려가 매를 맞아죽었다.

      또 좌의정 심정이 경빈과 결탁했다고 하여 사사되었으며, 그 외에도 많은 사람들이 연루되어 죽었다.

      또한, 경빈박씨와 그녀의 아들 복성군도 서인으로 전략하여 유배되었다가 사사되었으며, 박씨의 두 딸도 서인으로 전략하여 유배되었다.

      그런데 그들이 죽은뒤인 1533년에 같은 서체의 방서가 발견되었다.

      그 글씨를 쓴 자를 조사하는 과정에서 김안로는 지난번 발견된 방서의 글씨와 다르다 하였고, 대사간 상진은 지난번 글씨와 같다고 하였다.

      경빈과 심정을 죽일때 김안로는 방서의 글씨가 경빈의 사위 홍려의 것이라고 주장했고, 홍려는 매질을 이기지 못해 자기글씨가 맞다고 자백하고 죽었다.

      때문에 김안로는 글씨가 다르다고 주장할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상진은 지난번의 방서와 새로 발견된 방서의 글씨가 같다고 주장함으로써 홍려는 범인이 아니며 경빈과 복성군이 억울하게 죽었다는 점을 밝히려 했다.

      중종이 방서가 적힌 나무를 태우게 하면서 이일은 종결되었는데, 훗날 방서의 글씨는 김안로의 아들 김희의 글씨로 판명되었다.

      김안로가 심정에게 원한을 품고 그를 죽이기위해 작서의 변을 획책하였다는 결론이다.

      그 사실이 밝혀지면서 이미 죽고 없던 김안로는 천하에 둘도 없는 사악한 모사꾼의 대명사가 되었다.

      하지만 방서의 글씨가 정말 김희의 글씨라고 단정할수 있는 증거는 없다.


      출처:네이버

      도움이 되셨길 바랍니다.

    • 안녕하세요. 김종호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조선 중종 22년(1527) 일어난 무고사건으로

      시작은 작서의 변이지만 가작인두의 변과

      그 이후까지 사건의 흐름이 길게 이어져,

      중종, 김안로, 경빈 박씨와 복성군,

      그리고 어쩌면 문정왕후도 엮였을지 모르는

      복잡한 정치적 음모입니다.

    • 안녕하세요. 박세공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작서의 변이란 작서(불에 탄 쥐)와 관련된 사건에서 발생하여서 작서의 변이라 합니다.

      1527년 2월 26일 누구의 소행인지 모르나 동궁 해방에 쥐를 잡아 사지와 꼬리를 자르고 입·귀·눈을 불로 지진 쥐 한 마리를 세자가 거처하던 동궁의 북정 은행나무에 걸어놓고 생나무 조각으로 방서를 만들어 걸어두었습니다.

      이런한 행위가 동궁 세자를 저주한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사건이 대전 침실의 전란에서 다시 일어나자, 우의정 심정이 이를 듣고 이유청과 함께 왕에게 아뢰어 범인의 검거를 청했습니다.

      그러나 범인은 잡히지 않은 채 의혹만 커가서 당시 지목당하고 있던 경빈박씨의 소행이라 하여 그의 시녀와 사위인 홍려의 종들이 심문 중 매를 맞아 죽었고, 또한 형벌에 못이겨 거짓 자백한 자도 있었습니다.

      이에 경빈 박씨와 아들 복성군은 함께 서인(庶人)이 되어 쫓겨났고, 그 뒤 다시 동궁의 가상을 만들어서 나무패를 걸고 거기에 망측스런 글을 쓴 일이 생겨, 서인이 된 경빈 박씨와 복성군은 사사되었습니다.

      두 옹주를 폐서인으로 만들었으며, 홍려도 매를 맞아 죽었습니다. 광천위 김인경은 밖으로 내쫓겼으며, 좌의정 심정도 경빈 박씨와 결탁하였다 하여 사사되었습니다.

      1532년 이종익의 상소에 의해 진범이 김안로의 아들 희라는 사실이 밝혀졌습니다. 김안로는 심정과 유자광 등에게 원한을 품어오던 중 아들 희를 시켜 작서의 변을 일으키게 한 것이었습니다.

      이 사건은 아들이 부마로 있음을 계기로 정권을 농단하다가 권세를 잃게 되자 권세를 만회하고자 한 김안로의 사행으로, 당시 정계에 큰 파문을 일으켰습니다.

    • 안녕하세요. 조사를 해본 결과 작서의 변은 조선 중종 22년(1527년)에 발생한 사건으로, 경빈 박씨가 세자를 저주했다는 사건입니다.


      1527년 4월 23일, 중종의 생일에 동궁 침실 창문 밖에서 사지와 꼬리가 잘리고 입과 귀ㆍ눈이 불로 지져져 있는 쥐가 발견되었습니다. 이 쥐는 세자를 저주한 것이라고 여겨졌고, 경빈 박씨가 범인으로 지목되었습니다.


      경빈 박씨는 세자의 생모가 아니었지만, 중종의 총애를 받고 있었고, 복성군(경빈 박씨의 소생)을 세자로 만들려는 야심을 가지고 있다는 의심을 받았습니다. 또한, 경빈 박씨의 심복인 김안로가 이 사건을 조작했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중종은 경빈 박씨와 복성군을 폐서인하고, 김안로를 유배 보냈습니다. 이 사건으로 인해 경빈 박씨와 복성군은 죽음을 당했고, 김안로는 유배에서 풀려나지만 2년 후 사사되었습니다.


      작서의 변은 조선 중종 시대에 일어난 중요한 사건으로, 중종의 정치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또한, 이 사건은 조선 후기에도 정치적 음모의 상징으로 자주 언급되었습니다. 도움이 되셨다면 좋아요 & 추천 부탁드려요 ~좋은 하루 되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