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의 우왕은 왜 신돈의 자식이라는 소문이 있었던 건가요?
공민왕의 아들이자 후계로 우왕이 되는 왕우는 사실 신돈의 아들이라는 스캔들이 있었는데요.
우왕이 공민왕의 아들이 아닌 근거나 신돈의 아들인 근거가 있었나요?
안녕하세요. 유영화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우왕이 신돈의 자식이라는 근거는 그의 어머니와 관련됩니다. 즉 노국공주가 죽은 이후 공민왕과 관계한 우왕의 어머니, 반야는 신돈의 비첩이라는 주장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혁명파 신진사대부들 사이에 주장인 '폐가입진'의 근거이고도 합니다.
이런 소문과 폐가입진을 정당화하고, 조선 개국의 명분 논리는 정인지 <고려사>에도 기록하고 있습니다. <고려사>는 우왕을 신우라고 표기하고, 그의 어머니는 신돈의 비첩이라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이 소문은 사실과 다릅니다. <고려사>에도 공민왕이 우왕을 자신의 아들로 인정하는 기록이 있어요. 공민왕은 신돈의 집에서 반야라는 여인과 가까워져 아들을 낳았다고 합니다. 또한 우왕이 폐위된 이후에도 이색이 그의 아들 창왕을 즉위하게 한 것은 우왕이 왕씨 혈통이라는 근거입니다.
만족스러운 답변이었나요?간단한 별점을 통해 의견을 알려주세요.안녕하세요. 경제·금융전문가, 인문·예술 전문가 조유성 AFPK 입니다.
✅️ 근거는 없는데 소위 '폐가입진' 즉, 가짜를 폐하고(우왕, 창왕) 진짜를 세워야 한다(새로운 왕조)을 내세운 것인데, 이는 신진 사대부와 신흥무인세력이 소위 고려를 멸하고 조선을 건국하는데 있어서 필요한 이데올로기로 사용되었던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만족스러운 답변이었나요?간단한 별점을 통해 의견을 알려주세요.안녕하세요. 박에녹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고려 우왕의 혈통문제는 정사에서 언급되기 보다는 야사 또는 사람들의 소문에서 비롯된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당시에 이런 소문들이 있었던 이유는 고려 공민왕이 왕비였던 노국공주 사후에 정사를 돌보지 않았고 신돈이 고려의 정치를 좌우했던 것과 연관성이 있습니다. 특히 신돈이 공민왕에게 여종 반야를 바치고 그 반야에게서 아들을 얻었는데 이 아들이 모니노(왕우) 였습니다. 그런데 공민왕은 황실에서 아이를 키우지 않고 신돈의 친구인 능우라는 스님에게 아이를 맡겨 키웠고 갑자기 모니노를 후사로 세우고 이름을 '우'라고 칭합니다. 우왕의 어머니가 반야라는 부분에서 우왕이 신돈의 아들이 아니냐는 주장들이 나오게 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만족스러운 답변이었나요?간단한 별점을 통해 의견을 알려주세요.안녕하세요. 김기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우왕은 이성계에 의해 왕위에서 쫓겨나 죽임을 당했을 뿐만아니라 신돈의 아들로까지 몰렸으므로 죽은 뒤에도 시호를 받지 못했습니다. 《고려사》나 《동국통감》에는 아예 왕우가 아닌 신우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고려사》에서는 우왕이 신돈의 서자로서 왕위를 도둑질하였다고 하여 반역의 열전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조선시대의 사서들은 우왕은 공민왕의 아들이 아니라 신돈이 비첩인 반야라는 여인과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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