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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따운안경곰70
아리따운안경곰7023.08.19

고려 창왕이 실제로는 신돈의 아들이었나요?

고려의 창왕이 당시 승려이면서 권력을 잡고 있던 신돈의 아들이라는 이야기가 있던데

이것은 근거가 있는 소리인가요?


아니다는 쪽의 의견을 보면 급진적인 역성혁명을 추진하던 이성계왼 정도전 등이 창왕의 폐위를 위해 날조한 것이다고 하던데

실제 사료들에서는 어떤 것이 더 진실에 가깝다고 할 수 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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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변의 개수
5개의 답변이 있어요!
  • 탈퇴한 사용자
    탈퇴한 사용자23.08.19

    안녕하세요. 임지애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창왕은 신돈의 손자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우왕이 신돈의 아들이라고 합니다.

    조선시대의 사서들은 우왕을 공민왕의 아들이 아니라 신돈이 비첩(婢妾)인 반야(般若)라는

    여인과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승려이기는 하였으나 여자 관계가 복잡했던 것 같습니다.

    고려의 제33대 왕(재위 : 1388~1389). 우왕의 아들, 어머니는 시중 이임의 딸 근비.

    1388년(우왕 14) 우왕이 왕(王)씨의 혈통이 아니고 신돈(辛旽)의 아들이라는 이유로 폐위되자 뒤를 이어 즉위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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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현대 한국 사학계에서는 기록의 모순 등의 이유로 우왕이 신돈의 아들일 가능성에 대해 회의적으로 봅니다.

    우왕은 공민왕과 신돈의 시녀인 반야 사이에 태어났는데 반야는 신돈의 시녀로서 신돈을 가까이했고 왕비나 후궁들처럼 다른 남자의 접근이 차단된 환경에 산게 아니었습니다.

    공민왕은 직접 ' 이 아이는 내가 신돈네 집 여종을 가까이 해 낳은 아들이다' 라고 인정했지만 목격자는 이인임 밖에 없었으므로 우왕이 즉위할 때부터 공민왕의 아들이 아닌 신돈의 아들이라는 소문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 훗날 이성계 일파가 창왕을 폐위하면서 '우왕이 신돈의 아들이니 창왕은 신돈의 손자'라는 무리한 주장을 할수 있던 것은 고려 사람들 사이에서 우왕의 혈통을 의심하는 움직임이 있었음을 증명, 그러나 우왕의 혈통에 대한 의심이라해도 우왕의 혈통이 왕씨가 아니라는 주장에 대한 기록은 우왕 재위 당시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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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황정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실제로 신돈의 아들이었는지 아닌지는 아무도 알 수 없지만

    현대 한국 사학계에서는 우왕이 신돈의 아들이라는 주장에 대해 상당히 회의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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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김기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우왕과 최영 장군의 명에 의해 요동정벌에 나선 이성계는 4불가론을 주장하면서 위화도에서 회군하여 역성혁명을 일으킵니다. 그러나 왕위를 찬탈했다는 소리를 듣지 않기 위해 우왕과 창왕이 신돈의 아들이라는 소문을 내서 우왕은 강원도에서 창왕은강화도에서 살해되고 우유부단하고 자신들의 말을 잘 들을 인물인 공양왕을 추대했다가 양위를 받고자 계획하에 움직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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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고려 33대 창왕은 사실 우왕이 폐위된 이상 즉위할 가능성이 거의 없었으나 이성계의 정적이었던 조민수 와 이색의 주도로 옹립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나이가 어렸고 이미 이성계 일파에 의해 정국이 장악된 시대였으니 실권이 없는 허수아비 군주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고려가 망해 가던 당시 고려 왕조를 더욱 더 깍아 내리기 위해서 아마도 더 이러한 소문이 돌았을 것으로 판단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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