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굳센때까치29
굳센때까치2923.07.18

아르헨티나 옆 포클랜드 섬에서 발생한 포클랜드 전쟁에 대해 알려주세요~

아르헨티나 옆에 있는 섬인 포클랜드의 섬에서 발생한 포클랜드 전쟁에 대해 알려주세요~ 그리고 지금도 왜 아르헨티나가 아니라 영국의 영토로 포함되어 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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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정준영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아프리카 문제를 잘 해결한 대처에게 다가온 새로운 외교 문제는 그녀의 다음 집권과도 깊은 관계가 있는 포클랜드 사태였다. 대부분의 영국인들이 잠들어 있던 1982년 4월 2일 새벽에 영국 영토의 일부가 침략당했다. 이곳은 바로 포클랜드 제도로서, 영국민들은 잘 모르지만 아르헨티나인들은 '말비나스(Malvinas)'란 이름으로 잘 알고 있는 지역이었다. 아르헨티나는 18세기에 이곳을 스페인으로부터 할양받으려 했으나 이미 초기 이민단을 보내 놓고 있던 영국이 권리를 주장하여 영국령으로 인정받았던 곳이다. 이후 줄곧 영국의 통치 아래에 있었고 1982년에도 변함 없이 영국계 주민들이 살고 있던 영국 소유지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포클랜드 제도 소유권에 대한 아르헨티나의 미련은 영국이 국제적으로 약해지던 1965년 이후부터 줄곧 계속되어 왔고, 1976년 군사 정권이 들어선 후 민심에 신경을 쓰던 아르헨티나는 한층 더 이곳에 대해 강한 관심을 표명했다. 이것이 아르헨티나인들이 포클랜드 제도를 침략한 1차 목적일 수 있었다.

    그러나 영국도 아르헨티나가 오판할 수 있는 기회들을 많이 보여 주었다. 영국의 남극 조사단은 사우스조지아 섬에 있는 탐사 기지의 자원이 점차 줄어들고 있으므로 인근 포클랜드 섬에 대한 관심도 점차 줄어들고 있다는 보고를 했었고, 거기에다 국방성은 돌연 포클랜드를 경비하고 있던 전함 인듀런스 호를 철수하기로 결정했고, 이런 상황에 영국 정부는 1981년 국적법에 편승하여 영국 출신의 부모를 갖지 못한 800명의 포클랜드 주민들에게 영국 시민권을 주지 않도록 결정한 것 등의 일이 그것이었다. 이러한 점들이 아르헨티나에게는 영국이 아메리카 대륙의 마지막 식민지를 포기하는 것으로 오판하게 했다.


    물론 이들의 침략은 갑작스러운 것은 아니었다. 대화는 계속됐지만 양국 관계는 계속 나빠졌고, 통화 수축과 경제 정책 실패로 국민들에게 압력을 받고 있던 아르헨티나 군부의 대통령 갈티에리 장군은 그 탈출구로서 이 섬의 재회복을 생각해 냈다. 1982년 4월 1일 군부의 외무장관이던 코스타 멘데스는 영국 대사에게 식민지 분쟁에 대한 외교 채널은 닫혔다고 알려 주었고 침략은 그 다음날 일어났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대처는 먼저 미국 대통령이자 그녀의 가까운 친구인 레이건에게 도움과 최소한 중립 고수를 부탁하는 전화를 걸었고, 유엔 안전 보장 이사회에서 아르헨티나군의 철수에 대한 결의문을 채택하도록 했다. 또 아르헨티나에 대한 군수 물자의 수출 금지와 수입 금지를 위한 EEC의 지지 및 영연방과 나토의 후원까지 받아 냈다. 심지어는 아르헨티나의 통치권 요구를 지지했던 대부분의 라틴 아메리카 국가도 무력 사용은 거의 지지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인권의 학대로 이미 악명을 드날리던 군사 정권이었기 때문이다. 영국 은행은 영국 내의 아르헨티나 자산을 동결했다.

    한편, 영국 내부에서는 당시 영국 함대의 훈련 및 경비 비용 삭감론이 대두되고 있었으나 해군 사령관 헨리 리치 경이 앞장서서 대처를 설득하여 기동 함대를 남대서양에 파견할 것을 주장했다. 내각에 의해 기동 함대가 구성되자 대처는 내각 각료들에게 작은 위기 내각(전시 내각)을 구성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때 장관들과 내각 비서실의 암스트롱 경, 노련한 국방성 참모진들로 구성된 남대서양 대외 방어 위원회(ODSA : Overseas and Defence Committee South Atlantic)가 조직되었다.

    4월 5일 기동 함대는 장엄하게 포츠머스 항구를 미끌어져 나갔다. 비록 이 전쟁에 참여한 가족들은 슬퍼했지만, 힘찬 밴드가 연주되는 가운데 깃발을 휘날렸고, 함선 위의 장병들의 사기는 하늘을 찌를 듯이 높았다.


    기동 함대는 100척이 넘었고, 병력은 2만 7천 명으로 구성되었다. 기동 함대에는 항공 모함 '헤르메스'와 '인빈서블'을 포함하여 '앤트림', '글러모건' 같은 낡은 것과 42형, 22형 등의 최신형 구축함도 있었다. 또 잠수함들과 수륙 양용의 670톤의 원항 예인선인 '요크셔먼' 호까지 최소한 70여 척 이상의 상선들이 군대 수송을 위해 징발되었다.

    이들 함대는 대서양 중간에 있는 영국령 어센션 섬에서 미국의 편의 시설들을 이용했고, 군비를 재정비했다. 4월 25일 아르헨티나군이 점령하고 있던 사우스조지아 섬을 최초의 군사 행동으로 되찾았다. 이때 영국군은 전혀 피해가 없었고 아르헨티나 병사 둘만이 사망했을 뿐이었다. 8천 마일을 이동해 왔고 1945년 이후 현대전을 한 번도 치르지 않았던 영국군에게 있어 남조지아 섬에서의 승리는 큰 의의가 있는 것이었다.


    다시 말해서 자신을 얻은 영국군은 이제 신속한 승리만을 생각하게 되었고, 아르헨티나의 순양함 벨그라노 호를 격침시키면서 제해권을 제압하기 시작했다. 영국도 구축함 셰필드 호가 격침되는 대가를 치러야 했지만, 벨그라노 호의 전사자는 368명이었음에 비해 셰필드 호에서는 21명만이 전사했을 뿐이었기에 아르헨티나 해군의 사기 저하는 클 수밖에 없었다.

    포클랜드 섬 탈환은 5월 21일 해병대와 공수 부대가 동포클랜드 섬의 서쪽 끝인 산카를로스에 상륙 거점을 마련함으로써 시작되었다. 영국 최고의 특공대와 아르헨티나 정예군과의 절정에 다다른 전투는 영국의 재탈환으로 끝이 났다. 이 전투에서 영국군은 255명의 사망자와 777명의 부상자가 발생했는데, 이는 한국전에 참전한 영국군의 1/3에 해당하는 숫자였다. 영국군은 의외로 사상자 수가 적었고, 아르헨티나는 훨씬 많은 사상자를 내고 항복했다. 결국 이 전쟁으로 영국은 단기간이었지만 소득면에서는 대단히 많은 것을 얻었다고 말할 수 있다. 많은 영국민들은 매일 밤 전쟁 소식을 접하면서 이러한 기적적인 결과에 대해 자부심과 만족감을 느꼈다.


    이제 민족적인 쇠퇴, 실업, 파운드 절하 등의 국내적인 문제는 여론에 큰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공격이 있기 전까지만 해도 민주당 하원 의원인 앤드루 폴즈는 '확실한 미친 짓'이라며 비웃었으나 이제 상황은 그렇지 않았다. 영국은 다시 한 번 옛날의 자신들이 누렸던 영광스러운 제해권을 실제로 보여 주어 영국의 이미지를 높일 수가 있었다고 입을 모았고, 이 기간 동안 영국 정가에서는 명예와 품위라는 말들이 많이 나왔는데, 그 말의 주인공으로 대처가 올라서게 되었다. 한편 이 전쟁으로 인해 아르헨티나의 군사 정부는 더욱더 빠르게 몰락의 길을 걷게 되었다.

    출처 : 영국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