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시대 때 불교를 국교로 정한 이유가 있나요?
안녕하세요? 고려시대 때 불교를 국교로 정한거 같은데요~불교를 국교로 정한 이유가 있을까요? 고려공부를 하다보면 어려운게 너무많으거 같습니다.
안녕하세요. 이승원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고려시대의 불교는 신라불교를 그대로 계승하는 한편 송(宋)나라의 영향 아래 독자적인 발달을 이루었다. 태조 왕건(王建)은 불교를 국교로 정하고 새로 승과(僧科)를 제정하여 승려를 우대하였다. 연등회(燃燈會)ㆍ팔관회(八關會) 등을 연중행사로 개최하는 등 태조의 숭불정책은 고려 전반에 걸쳐 계승되면서 사상적 지주가 되었다. 당시에 건립된 사찰로는 개성의 왕륜사(王輪寺) ㆍ 법왕사(法王寺)를 비롯한 16사(寺)와 봉은사(奉恩寺)ㆍ진관사(津寬寺)ㆍ부석사(浮石寺)ㆍ관음사(觀音寺)ㆍ숭교사(崇敎寺)ㆍ석왕사(釋王寺)ㆍ영명사(永明寺) 등이 있으며, 공예품으로는 관촉사(灌燭寺) 석등, 부석사 조사전벽화(祖師殿壁畵), 대흥사(大興寺)의 종 등 우수한 예술품을 낳았다.
특히 문종(文宗) 연대에는 고려판 팔만대장경(八萬大藏經)을 간행하여 한국불교문화의 대표작을 남겼다. 고려는 불교를 국교로 삼았음에도 이름난 고승은 많이 배출되지 못하였다. 그 중에서 체관(諦觀)은 천태종을 재흥시켰고, 대각국사(大覺國師) 의천(義天)은 문종의 아들로 일찍이 11세 때 승려가 되어 송나라에 유학한 후 교장도감(敎藏都監)을 설치, 속장경(續藏經) 4,740여 권을 간행한 것은 특기할 만하며, 또 문하생이 1,000명이 넘었다고 한다. 의천이 개창한 천태종은 명실상부한 하나의 종파로서 부각되었다. 천태종이 개창되고부터 중기 이후에 선불교는 상당히 부진했다. 게다가 고려 중기에는 승려들이 타락하고 법문의 문란이 극에 달해 표면상으로만 화려한 불사들이 이어졌다. 특히 지눌(知訥)은 부처님의 뜻을 전하는 것이 선(禪)이요, 부처님의 말씀을 깨닫는 것이 교(敎)라고 믿었기 때문에 선과 교는 떨어질 수 없는 사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는 선교합일의 정혜쌍수를 표방하고 대각국사 의천의 교관병수(敎觀修) 사상과 그 맥을 같이 한다.
그 밖에도 고려 중기에는 수기(守其)ㆍ균여(均如)등이 활약하였으며, 고려 말기에는 나옹(懶翁)ㆍ보우(普愚)ㆍ보조(普照)ㆍ백운(白雲) 등이 이름을 떨친 고승들이었다. 고려의 불교종파는 신라의 종파가 계승되었다가 말기에 다소 분화되어 조계종(曹溪宗)ㆍ천태법사종(天台法師宗)ㆍ천태소자종(天台疏子宗)ㆍ화엄종ㆍ총남종(摠南宗)ㆍ자은종(慈恩宗)ㆍ신인종(神印宗)ㆍ남산종(南山宗)ㆍ도문종(道門宗)ㆍ중신종(中神宗)ㆍ시흥종(始興宗)의 11종이 성립되었으며 그 중 화엄ㆍ자은ㆍ총남ㆍ중신ㆍ시흥의 5종을 5교(敎), 조계ㆍ천태의 2종을 양종(兩宗)이라 하여 5교 양종의 종파를 이루었다. 이처럼 고려불교는 여러 종파의 확립과 더불어 불교가 국운을 번영하게 하는 데 지대한 역할을 한다. 사원은 법력으로 나라를 수호하는 장소였으며 국왕에게 여러 왕자가 있다면 한 사람은 승려로 만들 정도였다. 불교가 국가의 정신지주로 신봉되면서 나라가 위급할 때 구국불사로서 거대행사도 성행하였다.[네이버 지식백과] 고려시대 불교 (문화원형백과 승려의 생활, 2005., 문화원형 디지털콘텐츠)
만족스러운 답변이었나요?간단한 별점을 통해 의견을 알려주세요.안녕하세요. 이예슬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자료에 따르면 다음의 내용이 있는데, 왕건이 불교를 믿었고 그에 따라 왕씨의 나라인 고려가 자연스럽게 불교를 국교로서 받아들였다고 생각됩니다.
훈요십조에 기록된 불교에 관한 사항들훈요십조 1조에 보면 고려의 태조 왕건이 나라를 건국할 때 불교의 도움으로 받았다고 기록돼 있다. 고려 건국의 이념이 되고 정신적 도움이 된 것이 불교라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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