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 백제, 신라 삼국시대에는 서로 의사소통이 가능 했을까요?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는 시간이 지나면서 변해 오고 있습니다. 삼국시대 소위 고구려, 백제, 신라인들은 서로 통역 없이 의사소통이 가능했던것일까요?
안녕하세요. 이승원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한 언어의 여러 방언들이 변천해 온 역사. 다시 말해서 둘 이상의 방언으로 구성된 언어의 경우에 원래 방언차가 없던 상태에서 방언차가 생겨나 각각의 방언으로 분화되고 각 방언이 변화해 온 과정을 방언사라 한다. 국어의 경우에 국어사는 국어가 크게 보아 동질적인 언어라는 관점에서 국어 전체를 대상으로 하는 데 반해 방언사는 국어가 이질적인 방언들의 총체라는 관점에서 각 방언을 대상으로 한다는 점에 차이가 있다.
현대 국어가 여러 이질적인 방언들로 이루어져 있음은 분명하다. 그러나 그러한 방언 분화가 언제 어떻게 이루어졌는지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별로 없다. 그것은 과거의 국어가 어떤 모습이었는지를 알려 주는 문헌이 많지 않기 때문이다. 한글이 만들어진 15세기 이후에는 국어를 그대로 기록한 자료가 꽤 많이 남아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그 대부분은 지역적으로 수도 서울의 방언을, 계층적으로 왕실과 관리들의 방언을 반영하고 있기 때문에 다양한 방언의 실상을 알려 주지 않는다. 그나마 지방에서 간행한 일부 문헌들에는 그 지역의 방언이 단편적으로 반영된 흔적이 보인다. 이와 같이 문헌상의 언어를 현대의 지역 방언과 분명히 관련지을 수 있는 것은 16세기 후반 이후의 경우에 국한된다.
그러한 예들을 종합하면 적어도 근대 국어가 시작되는 17세기 무렵에는 이미 현대의 지역 방언들이 형성되어 있었던 것으로 단정할 수 있다. 그 이전의 방언 분포에 대해서는 정치사나 주민 이동사 등 언어 외적 사실들로부터 추측할 수밖에 없다.
우리 민족이 언제부터 한반도에 살기 시작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고조선, 부여, 고구려, 예, 옥저, 마한, 진한, 변한, 백제, 신라, 가야 등 한반도와 만주 일대에 세워졌던 나라들의 언어가 국어의 조상이 되었으리라는 것은 부인할 수 없다. 그들의 세력권과 교류 관계를 참고하면 한반도 북부와 만주에 있었던 고조선, 부여, 고구려, 예, 옥저 등이 유사한 언어를 사용했고, 한반도 남부에 있었던 마한, 진한, 변한, 백제, 신라, 가야 등이 유사한 언어를 사용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전자를 부여계(夫餘系) 언어들, 후자를 한계(韓系) 언어들이라 부를 수 있다. 이들이 모두 알타이 조어(祖語)로부터 갈라져 나온 단일한 언어의 방언들이었다면 국어의 방언 분화는 벌써 그 이전에 일어난 셈이다.
그러나 각 나라의 말이 서로 다른 언어였는지 한 언어의 방언들이었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백제어와 신라어는 같은 언어의 두 방언이었을 것이다. 지명의 접미 요소로 쓰인 백제어 ‘夫里(부리)’와 신라어 ‘火(블)’의 관계처럼 같은 단어의 서로 다른 방언형이라고 생각되는 예들이 많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고구려어 지명의 접미 요소로 쓰인 ‘忽(홀)’ 역시 ‘夫里, 火’와 어원적으로 같은 단어임은 분명하나 발음상 꽤 큰 차이를 보인다. 부여계 언어들은 한 언어의 방언들이고 한계 언어들 또한 한 언어의 방언들이었을 가능성이 가장 큰 것으로 보인다. 부여계 언어들과 한계 언어들의 관계가 언어와 언어의 관계였는지 방언과 방언의 관계였는지는 확실치 않다.
이 당시에도 계층에 따른 방언이 존재했을 가능성이 있다. 백제어에서 ‘왕’을 지배층은 ‘어라하(於羅瑕)’, 피지배층은 ‘건길지(鞬吉支)’라 한 것이 그 예이다. 고구려로부터 남하한 백제의 지배층의 말은 부여계이고 피지배층인 마한 백성들의 말은 한계이기 때문에 이러한 차이가 생긴 것으로 해석된다.
고대 삼국의 언어(또는 방언) 중에서 현대 국어의 직접적인 조상은 신라어라 할 수 있다. 7세기에 신라의 삼국 통일로 한반도 중부와 남부에서는 신라어를 중심으로 한 언어적 통일이 이루어졌고 그것이 고려와 조선을 거쳐 현대 국어로 이어진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10세기에 고려가 개성을 수도로 삼아 건국하게 되면서 국어의 중심지는 경주에서 개성으로 옮아가게 되었다. 개성은 원래 고구려 땅이었으므로 이때 개성에서는 고구려어 요소가 어느 정도 남아 있는 신라의 한 방언이 쓰이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조선이 개성에서 서울로 수도를 옮긴 것은 같은 지역 안에서 일어난 중심지의 이동이므로 국어의 모습에 큰 변화를 주지 못했을 것이다. 따라서 10세기부터 현대까지 천 년이 넘는 동안 한반도 중서부(특히 개성과 서울)의 방언이 국어 방언들의 구심점이 되었다.
현대의 각 방언들이 부여계 언어들 및 한계 언어들과 어느 정도 관련성이 있는지 확실치 않다. 특히 한반도 북부는 고대에 여러 나라들이 흥망을 거듭했고 발해 멸망 이후 조선 초기까지는 우리 영토 밖에 있었기 때문에 그곳에서 쓰이던 부여계 언어들이 현대의 서북 방언 및 동북 방언의 직접적인 조상인지 아닌지 알 수 없다. 고구려어가 서북 방언이나 동북 방언과만 일치하는 예도 발견되지 않는다. 백제어와 서남 방언 또는 충청 방언, 그리고 신라어와 동남 방언의 관련성은 그보다 더 밀접하다고 생각되지만 그것을 실증해 주는 자료 역시 찾기 어렵다.
15세기 이후에 국어의 여러 방언들은 많은 변화를 겪었다. 방언에 따른 변화의 차이는 방언 분화를 일으켰다. 15세기의 중부 방언에는 ‘ㅸ’과 ‘ㅿ’이 있었다. 동북 방언과 동남 방언은 ‘ㅸ>ㅂ’의 변화를, 나머지 방언은 ‘ㅸ>w’의 변화를 겪었다. 15세기의 형용사 ‘칩다(춥다)’는 모음 어미와 결합할 때 ‘치’로 활용했는데 이것이 동북 방언과 동남 방언에는 ‘치버, 치바, 추버, 추바’ 등으로 나타나고 나머지 방언에는 ‘추워, 추와’ 등으로 나타나 ‘ㅸ’이 ‘ㅂ’으로 바뀌었는지 ‘w’로 바뀌었는지에 따른 분화가 일어났다. 또 동북 방언, 동남 방언, 서남 방언, 제주 방언은 ‘ㅿ>ㅅ’의 변화를, 서북 방언과 중부 방언은 ‘ㅿ>Ø’의 변화를 겪었다. 15세기의 ‘가’(가을)은 서북 방언과 중부 방언에 ‘갈, 가을’ 등으로, 나머지 방언에 ‘가실, 가슬’ 등으로 나타난다. 중부 방언의 경우 ‘ㅸ>w’의 변화는 15세기에, ‘ㅿ>Ø’의 변화는 16세기에 일어났음을 문헌을 통해 알 수 있다. 그러나 다른 방언의 경우 ‘ㅸ, ㅿ’의 변화가 일어난 시기를 알려 주는 자료는 없다.
따라서 ‘ㅸ, ㅿ’에 의한 방언 분화가 15세기 이후에 일어난 것인지 그 이전에 일어난 것인지는 알 수 없다. ‘ㅸ’과 ‘ㅿ’에 대해 생각할 수 있는 다른 가능성은 동북 방언과 동남 방언의 ‘ㅂ’과 동북 방언, 동남 방언, 서남 방언, 제주 방언의 ‘ㅅ’이 고대로부터 아무 변화가 없었고 나머지 방언에서만 ‘ㅂ>ㅸ>w’의 변화와 ‘ㅅ>ㅿ>Ø’의 변화가 일어났다는 것이다.
15세기의 중부 방언에 있던 모음 ‘ㆍ’는 현대의 방언 중 제주 방언에만 남아 있다. 다른 방언에서는 ‘ㅏ, ㅡ, ㅓ, ㅗ’ 등 다른 모음에 합류해 ‘ㆍ’가 소멸했다. 15세기의 ‘ ’(닭)은 제주 방언에 ‘ ’으로, 나머지 방언에 ‘닥, 닭, 달기’ 등으로 나타난다. 그런데 어두 음절에서 양순음 ‘ㅂ, ㅃ, ㅍ, ㅁ’ 뒤의 ‘ㆍ’는 서남 방언과 동남 방언의 남단, 동북 방언의 북단, 즉 한반도의 최남단과 최북단에서 ‘ㅗ’로 나타난다. 15세기의 ‘ ’(파리)이 이들 지역에는 ‘포리’로, 제주 방언에는 ‘리’, 나머지 방언에는 ‘파리, 퍼리’ 등으로 나타난다. 양순음 뒤의 ‘ㆍ>ㅗ’는 근대에 모든 방언에서 일어난 양순음 뒤의 ‘ㅡ>ㅜ’와 동질적인 원순 모음화 현상이다. 이것은 두 변화가 비슷한 시기에 일어났음을 의미한다. 또 근대에 한반도의 최남단과 최북단에서 ‘ㆍ>ㅗ’의 변화가 일어났고 중부 방언에서 가장 먼 제주 방언에 ‘ㆍ’가 남아 있다는 것은 15세기에 국어의 모든 방언에 ‘ㆍ’가 실존했으며 ‘ㆍ’ 소멸의 물결은 중부 방언으로부터 남북으로 퍼져나갔음을 말해 준다.
한편 구개음화는 대체로 남부에서 북부로 퍼져나간 변화였다. ‘ㄷ’ 구개음화는 16세기 후반의 서남 방언 문헌과 동북 방언 문헌, 17세기 전반의 동남 방언 문헌에 나타나기 시작해 18세기에는 중부 방언 문헌에도 나타난다. 현대의 방언 중 서북 방언과 동북 방언의 북단만 ‘ㄷ’ 구개음화 이전의 형태를 간직하고 있다. ‘ㄱ’ 구개음화는 16세기 후반의 동북 방언 문헌에 나타나기 시작해 18세기 전반의 서남 방언과 동남 방언 문헌에 나타난다. 현대의 방언 중 서북 방언과 중부 방언만 ‘ㄱ’ 구개음화 이전의 형태를 간직하고 있다. ‘ㅎ’ 구개음화는 16세기 후반의 서남 방언 문헌에 나타나기 시작해 17세기 전반의 동남 방언 문헌에 나타난다. 현대의 방언 중 서북 방언만 ‘ㅎ’ 구개음화 이전의 형태를 간직하고 있다. 대체로 구개음화는 16세기 후반에 서남 방언과 동남 방언에서 발생해 북쪽으로 퍼져 나갔으며 서북 방언만이 구개음화의 물결이 전혀 미치지 않은 방언이라고 할 수 있다.
15세기 중부 방언은 성조를 운소로 가지고 있었다. 현대의 방언 중에서는 동북 방언과 동남 방언에 성조가 남아 있고 서북 방언, 중부 방언, 서남 방언에는 음장이 존재하며 제주 방언에는 성조도 음장도 존재하지 않는다. 현대 방언들의 성조와 음장은 15세기 중부 방언의 성조를 계승한 것이다. 동북 방언과 동남 방언은 성조가 남아 있고 15세기의 ‘ㅸ’이 ‘ㅂ’으로 나타난다는 공통점을 가진다. 이것은 중부 방언에서 발생한 변화들이 퍼져나갈 때 낭림 산맥과 소백 산맥이 큰 장애물로 작용했음을 보여 준다.
그보다 더 큰 장애물은 육지와 제주도 사이의 바다라고 할 수 있다. 현대의 제주 방언은 나머지 방언들에 나타나지 않는 독특한 요소들을 보여 준다. ‘ㆍ’가 남아 있다거나 ‘ㅲ, ㅳ’ 등의 15세기의 자음군이 다른 방언에서는 경음으로 바뀐 데 반해 유기음으로 바뀌었다거나 조사와 어미의 형태들이 나머지 방언들과 차이가 많다거나 하는 등 국어의 여러 방언 중에서 가장 이질적인 모습을 보여 준다. 그러나 이러한 방언적 특성이 언제 어떻게 형성되었는지 알려 주는 자료는 없다.[네이버 지식백과] 방언사 (방언학 사전, 2003. 9. 30., 방언연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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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와 신라는 언어 차이가 심하기 때문에 백제의 통역으로 소통이 가능했습니다.
만족스러운 답변이었나요?간단한 별점을 통해 의견을 알려주세요.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삼국간에는 크게 의사 소통이 문제가 없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 이유는 당시의 기록을 보면 신라의 첩자 ( 세작) 들이 고구려나 백제로 가서 첩보 활동을 했다고 하는데 의사 소통이 문제가 없었기에 이렇게 서로 첩보 활동을 할수 있었던 것으로 미루어 보아 의사 소통에 문제가 없다고 보여 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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