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시험은 몇명이나 뽑는 시험이었나요?
조선시대에 과거시험을 준비하느냐고 집안살림 거덜내는 양반이 많았다고 하던데 일년에 몇명을 뽑았길래 과거시험의 악명이 높았나요??
안녕하세요. 박순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일반적으로 대과라고 하는 문과는 문관 관료 임용시험으로, 법제상 양인이라면 누구나 응시할 수 있었으며, 소과에 반드시 합격하지 않아도 응시가 가능했다. 앞서 언급하였듯 소과 합격자는 성균관에 입학할 경우 1차 시험인 초시 합격에 메리트가 있었으며, 그밖에 성균관 유생들을 대상으로 하는 특별 임용 시험 같은 별도의 혜택이 주어질 뿐, 소과와 대과는 별개의 시험으로 운영되었다.
문과(대과)는 1차 초시에서 240명, 2차 복시에서 33명을 끊는다. 마지막으로 이 33인의 순위를 가리는 3차 시험이 하나 더 있는데 이를 전시라 한다. 전시는 중요하지 않을 것 같지만, 처음 임관되는 품계가 달라지기 때문에 무시할 수 없는 시험이다. 장원 급제자는 종6품, 나머지 갑과에 해당하는 2명은 정7품, 을과 7명은 정8품, 병과 23명은 정9품부터 시작한다. 공신이나 당상관 이상의 자제들은 음직으로 문과에 급제하지 않고도 관직을 얻을 수 있었으나 비급제자로서 승진의 한계가 있었기 때문에 과거에 도전하는 경우가 다반사였다.
이렇게 복잡한 과정을 보면 시험에 평생을 바쳐도 모자랄 것 같지만, 보통은 30대 중반 정도면 합격했다. 젊은 나이에 합격한 사례가 없는 것도 아니다. 최연소 장원급제자는 17세에 급제한 박호(朴箎)[3]이다. 최연소 합격자는 고종 때 13세로 합격한 이건창(李建昌)이다. 고종 때 지나치게 많이 뽑았던 점을 고려한다면 최연소 합격자 기록은 15세다. 오늘날과 비교한다면 사법시험 최연소 합격자는 만 18세로 되어 있는데 이 당시 고등고시 사법과는 한 해에 40명 뽑던 시절이다
만족스러운 답변이었나요?간단한 별점을 통해 의견을 알려주세요.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문과는 3년마다 치르는 정기시인 식년시와 비정기시인 증광시, 별시, 알성시 등이 있었고 문과는 초시, 복시, 전시 순으로 초시서 각도의 인구 비례에 맞게 뽑아, 복시에서 33인을 선발, 왕 앞에서 치르는 전시에서 순위를 결정했습니다.
만족스러운 답변이었나요?간단한 별점을 통해 의견을 알려주세요.안녕하세요. 안동주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과거시험은 조선시대에 실시된 공무원 선발 시험이라고 보면 되겠습니다.. 시험은 매년 실시되지 않았고 시험의 종류와 난이도에 따라 합격자 수가 다양했는데요. 일반적으로 수십 명에서 수천 명 정도만 합격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적은 숫자입니다.
만족스러운 답변이었나요?간단한 별점을 통해 의견을 알려주세요.안녕하세요. 이주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조선시대의 과거제도.
문 과(文 科);-33명 선발.
소과(小科),
생원과,진사과로 구분하며
생원과는 사서오경으로 시험을 치러 100명이 합격하며
진사과는 문예(시,무,송,책)으로 시험을 치러 100명이 합격한다.
*합격된 생원.진사에게 백패(白牌)를 준다.
대과(大科).
초시(제1차 시험);-서울.지방에서 생원.진사.성균관 유생 중에서 선발하며
340명이 합격.
복시(제2차 시험);-서울에서 초시 합격자 중에서 선발하며 33명이 합격.
갑과;-3명,을과;-7명,병과;-23명.
첫째;-장원랑,둘째;-방안랑,셋째;-탐화랑.
붉은 종이 쓴 홍패(紅牌)를 준다.
무과(武科);-28명 선발.
초시(제1차 시험);-서울 각도 병영에서 200 명을 선발.
복시(제2차 시험);-서울 병조에서 초시 합격자 중에서 28명을 선발.
갑과;-3명,을과;-5명,병과;-20명.
붉은 종이 쓴 홍패를 준다.
잡과(雜科);-60명을 선발.
역과;-통역관 시험,초시를 거쳐 한어 23명,몽고.여진,왜어등 각 4명 선발.
의과;-의무관 시험,초시 18명,복시 9명을 선발.
음양과;-관상감 시험,초시 14명,복시 7명을 선발.
율과;-법무관 시험,초시 18명,복시 9명을 선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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