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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얀도화지113
하얀도화지11323.06.28

이순신 장군 앞에 '충무공'이순신이라고 부르던데, 앞에 있는 '충무공'은 무슨 뜻인가요?

안녕하세요

이순신 장군을 지칭할 때 종종 앞에다가 '충무공'이순신이라는 말을 하는데요

'충무공'이라는 뜻이 정확히 무엇인가요? 그리고 이러한 지칭?은 누가 하사를 했나요? 그 당시 조선왕이 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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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변의 개수6개의 답변이 있어요!
  • 안녕하세요. 이주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충무는 충성 충, 호반 무 시호입니다.

    임진왜란이 끝나고, 공신록을 작성할때, 당시의 선조가 임진왜란 당시에 활약했던 사람들에게 다 시호를 줍니다.

    대표적으로 충무공 이순신,

    그리고 충무공 김시민, 그리고 천민출신도 충무공이란 시호를 받았습니다. 정충신이라는 인물입니다.

    나라에 큰 공을 세운 장군에게 내려지는 시호입니다.


  • 안녕하세요. 천지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총무는 충성 충 자와 호반 무 자로 이루어진 시호 입니다. 주로 무인으로서 공을 세운 이들이 받았습니다. 추존된 작위에 따라 충무공, 충무후 등으로 부릅니다.

    충무공의 과거 나라에 큰 공을 세운 장군에게 내리는 시호인 충주를 받은 사람들을 높여 이르는 말입니다. 조선에는 이 시호를 받아 충무공을 불리는 사람은 총 9명 입니다. 인지도 순으로 따지면 이순신 - 감시만 - 남이 그 외 기타 입니다.


  •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보통 시호라고 하는 것은 나라나 왕실에 큰 공을 세운 사람인 공신에게 임금이 내린 것이 시호 (諡號)인데 충무공은 "충"충성하다 라는 한자 "무"힘을 뜻하는 (무력)한자 충성으로써 나라를 지킨자에게 내리는 시호 라고 합니다.


  • 안녕하세요. 김종호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충무공은

    '신하의 도리를 지키고 나라를 위하여

    몸을 아끼지 않아 밖으로는 외적을

    물리치고 안으로는 법도를 바로 세운'

    것으로 평가되는 이들에게 내려지는

    시호입니다.


  •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충무는 충성 충 자와 호반 무 자로 이루어진 시호로 주로 무인으로서 공을 세운 이들이 받았으며 추존된 직위에 따라 충무공, 충무후 등으로 불립니다.

    신하의 도리를 지키고 나라를 위해 몸을 아끼지 않아 밖으로는 외적을 물리치고 안으로는 법도를 바로 세운 것으로 평가되는 이들에게 내려지는 시호이므로 무인이 받을 수 있는 시호로서 최고의 선시 입니다.

    조선에서는 삼망이라하며 관리를 임명할 때 이조와 병조에서 적임자 3명의 명단을 적어 왕에게 추천하던 제도가 있었는데 이는 시호 제정 등에 중요 안건에도 사용되었습니다.

    당시 시호가 내려질 때 선정되었던 세 시호는 각각 충무, 충장, 무목이었고 시법에 따라 세 시호의 뜻을 풀어보면 일신의 위험을 마다않고 임금을 받들어, 적장 창끝을 꺾어 나라를 구했으며, 적을 무찔러 전란을 평정하였고, 덕을 펼쳐 의를 지켰다가 됩니다.


  • 안녕하세요. 정준영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시호의 기원은 중국에 두고 있으나 그 시기는 확실하지 않다. 요(堯)·순(舜)·우(禹)·탕(湯)·문(文)·무(武)를 시호로 보는 설도 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시법(諡法 : 시호를 의논해 정하는 방법)이 이루어진 것은 주나라 주공(周公)대부터라고 한다. 뒷날 진(秦)나라 시황제(始皇帝) 때에는 분서갱유(焚書坑儒)의 소용돌이 속에 폐지되었다가 한나라 때 복구되어 청나라 말기까지 시행되었다.


    우리 나라에서의 시호는 신라 법흥왕 원년(514)에 죽은 부왕에게 ‘지증(智證)’의 증시를 했다는 기록이 그 효시가 된다. 그러나 삼국시대와 고려시대의 시호 제도는 사료의 부족으로 그 절차나 범위 등 시법에 관한 것을 자세히 살펴볼 수 없다.


    시호 제도에 관한 상세한 내용은 조선시대에 와서 정비되었다. 특히 국왕이나 왕비가 죽은 경우에는 시호도감(諡號都監)을 설치하고 도제조(都提調)·제조(提調)·도청(都廳)·낭청(郎廳) 등을 임명해 시책(諡冊 : 국왕과 왕비가 죽은 뒤 시호를 올릴 때 쓰는 책으로, 옥으로 만든 옥책과 금으로 도금한 금보가 있음)을 올리도록 했으며, 증시 절차가 엄숙하게 진행되었다.


    국왕을 제외한 일반인의 경우는 봉상시(奉常寺)에서 주관해 증시 하였다. 그 절차는 때에 따라 약간의 다름이 있었으나 통상적으로는 다음과 같다. ① 시호를 받을 만한 사람이 죽으면 그 자손이나 인척 등 관계 있는 사람들이 행장(行狀)을 작성해 예조에 제출한다.


    ② 예조에서는 그 행장을 검토한 뒤에 봉상시에 보낸다. 봉상시에서는 행장에 근거해 합당한 시호를 평론해서 세 가지 시호를 정해 홍문관에 보낸다. 이를 시장(諡狀)이라고 한다.


    ③ 홍문관에서는 응교(應敎) 이하 3인이 삼망(三望)을 의논한 뒤 응교 또는 부응교가 봉상시정 이하 여러 관원과 다시 의정한다. 의정부의 사인(舍人)·검상(檢詳) 중 1인이 이에 서경해 시장과 함께 이조에 넘긴다.


    ④ 이조에서는 시호망단자(諡號望單子)를 작성해 국왕에게 올려 낙점을 받는다. 이 때 시호망단자는 삼망이 일반적이었으나 단망(單望)일 경우도 있었다.


    ⑤ 국왕의 낙점 후에 대간의 서경을 거쳐 확정된다. 이 시호 서경에서는 후보로 올랐던 시호는 제외되고 확정된 시호만을 올린다. 이와 같은 과정으로 확정된 시호는 국왕의 교지로 증시 된다.


    이와 같은 번잡한 절차에 대한 이론으로 1428년(세종 10) 이후 약 10여 년간은 봉상시에서 의정해 정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1441년에는 의정부에서 이조의 고공사(考功司)로 하여금 해당자의 행장을 가지고 그 옳고 그름을 밝히어 마감하게 하고, 그 실상을 조사해 확인한 뒤에 봉상시에서 시호를 의정하게 하였다.


    이 때 만약 성인의 법에 좇아 착한 행실이 많은 사람이라면 그 중에서 가장 착한 것을 택해 시호로 하였다. 단지 한 가지 착한 행실이 있다면 그 한 가지 착한 것을 취해 시호로 하게 하며, 오직 악한 행실만이 있을 때는 악한 시호를 주게 한다는 것이었다.


    시호를 의정할 때는 세 가지 시호를 올리는 것[三望]이 원칙으로 되어 있었다. 이순신(李舜臣)의 경우, 봉상시에서 의논한 세 가지 시호는 ‘충무(忠武)’·‘충장(忠壯)’·‘무목(武穆)’이었다.


    그리고 이 때 의논한 자의(字意)는 ‘일신의 위험을 무릅쓰고 임금을 받드는 것[危身奉上]’을 ‘충(忠)’이라 하고, ‘쳐들어오는 적의 창끝을 꺾어 외침을 막는 것[折衝禦侮]’을 ‘무(武)’라 한다.


    ‘적을 이겨 전란을 평정함[勝敵克亂]’을 ‘장(壯)’이라 하고, ‘덕을 펴고 의로움을 굳게 지킴[布德執義]’을 ‘목(穆)’이라 풀이하였다. 이 가운데 시호 서경을 거쳐 확정된 시호는 ‘충무’였다.


    예조에서 행장을 접수함이 없이[不待諡狀] 합의를 이루어 곧바로 시호를 내린 예도 있다. 이른바 신임사화 때 피살된 노론사대신(老論四大臣)인 김창집(金昌集)·이건명(李健命)·이이명(李頤命)·조태채(趙泰采)에게 내린 충헌(忠獻)·충민(忠愍)·충문(忠文)·충익(忠翼)의 시호 등이 그것이다.


    시호에 사용하는 글자의 수도 정해져 있었는데, 그 수는 때에 따라 달랐다. ≪주례 周禮≫의 시법에는 다만 28자요, ≪사기 史記≫의 시법에는 194자이다. 1438년(세종 20) 봉상시에서 사용하던 글자도 바로 이 194자였다.


    이 때 봉상시에서는 글자수의 부족으로 시호를 의논할 때 사실과 맞게 하기가 어렵다는 점을 들어 임금에게 증보할 것을 아뢰었다. 이에 세종의 명에 따라 집현전에서는 ≪의례 儀禮≫·≪경전통해속 經傳通解續≫·≪문헌통고 文獻通考≫ 등을 참고해 새로 107자를 첨가하였다.


    이리하여 우리 나라에서 시법에 쓸 수 있는 글자는 모두 301자가 되었다. 그러나 실제로 자주 사용된 글자는 문(文)·정(貞)·공(恭)·양(襄)·정(靖)·양(良)·효(孝)·충(忠)·장(莊)·안(安)·경(景)·장(章)·익(翼)·무(武)·경(敬)·화(和)·순(純)·영(英) 등 120자 정도였다.


    이러한 글자들은 모두 좋은 뜻을 담고 있다. 또한 그 한 글자의 뜻도 여러 가지로 풀이되어 시호법에 나오는 의미는 수천 가지라 할 수 있다.


    예를 들면, ‘문(文)’은 ‘온 천하를 경륜해 다스리다[經天緯地]’, ‘배우기를 부지런히 하고 묻기를 좋아하다[勤學好問]’, ‘도덕을 널리 들어 아는 바가 많다[道德博聞]’, ‘충신으로 남을 사랑한다[忠信愛人]’, ‘널리 듣고 많이 본다[博聞多見]’, ‘공경하고 곧으며 자혜롭다[敬直慈惠]’, ‘총민하고 학문을 좋아한다[敏而好學]’ 등 15가지로 쓰였다.

    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