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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따운안경곰70
아리따운안경곰7023.06.03

일본이 고종을 강제 퇴위 시킨 원인이된 사건과 퇴위에 대한 근거는 무엇인가요?

일본이 고종 황제를 강제 퇴위시켰다고 알고 있습니다


아무리 그당시라 하더라도 어느정도의 퇴위에 대한 근거는 있어야 될 것 같은데

어떤 사건을 이유로 퇴위를 꺼집어낸 것이고

고종을 강제퇴위 시킬 때

일본은 어떤 이유로 퇴위에 대한 정당성을 찾으려 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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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일본이 고종을 퇴위 시킨 가장 큰 이유는 고종이 헤이그 밀사 사건입니다. 이것에 책임을 져야한다며 왕위에서 물러날 것을 요구한 것 입니다. 이완용, 송병준 등 친일파들은 이토 히로부미와 함께 고종을 협박해 고종의 퇴위를 선언하는 ‘양위조칙’을 승인하도록 강제했다고 합니다. 결국 날조된 ‘양위조칙’이 발표되고 순종이 고종의 뒤를 이어 대한제국의 황제로 즉위 하게 됩니다.


  • 탈퇴한 사용자
    탈퇴한 사용자23.06.03

    안녕하세요. 임지애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한편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밀사를 파견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고종 황제의 운명도 마지막을 향해 치닫기 시작했다. 일제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황제 폐위를 단행하기 위해 고종을 무섭게 몰아붙였다. 7월 3일 이토는 마침 인천항에 입항한 일본 해군중장 일행을 대동하고 고종을 알현했다. 그 자리에서 이토는 일본에 대항하려면 공공연한 방법으로 하라고 고종을 힐난했다. 7월 6일 어전회의에서 친일파 대신 송병준도 고종이 스스로 일본 천황에게 가서 사과하든지 아니면 대한문 앞에서 하세가와 주차군 사령관에게 사죄하라고 2시간 동안이나 핍박했다.

    이토는 7월 7일 일본 총리대신 사이온지 긴모치(西園寺公望)에게 보낸 전보에서, 황제의 밀사 파견은 대한제국이 일본에 대해 공공연히 적의를 표현한 조약 위반 사실이므로, 일본은 대한제국에 선전포고를 할 권리가 있다고 주장했다. 또 향후 일본 정부가 취할 방책에 대해 원로대신들과 숙의해줄 것을 요청하면서, 대한제국 정부의 총리대신 이완용과는 이미 고종의 양위 문제를 거론했다고 보고했다.

    이토의 보고를 접한 일본 정부는 7월 10일 원로대신회의를 열고 이토 통감의 청훈(請訓)에 대해 논의했다. 그 결과 이번 기회에 대한제국 내정의 전권을 장악하고, 그것이 여의치 않을 경우 최소한 내각 대신 이하 중요 관헌의 임명에 통감이 동의할 권리, 통감이 추천하는 일본인을 내각 대신 이하 중요 관헌에 임명할 권리 등을 확보하기로 결정했다.

    이때 각의(閣議)에 제출된 「대한(對韓)처리요강」의 최초안은 첫째, 대한제국 황제로 하여금 대권에 속하는 내치 정무의 실행을 통감에게 위임하게 할 것, 둘째, 대한제국 정부로 하여금 내정에 관한 중요 사항은 모두 통감의 동의를 얻어 시행하게 하고, 또 시정개선에 대해 통감의 지도를 받겠다고 약속하게 할 것, 셋째 군부대신 · 탁지부대신은 일본인으로 임명할 것 등이었다.

    또한 제2안으로 첫째, 대한제국 황제가 황태자에게 양위하여 장래의 화근을 두절케 할 것, 둘째, 본 건의 실행은 대한제국 정부가 스스로 실행케 함이 득책이며, 황제와 정부는 통감의 부서(副署) 없이는 정무를 실행할 수 없게 하여 통감이 부왕(副王) 혹은 섭정의 권리를 가지게 할 것, 셋째, 대한제국 정부의 중요 각부에 일본 정부가 파견한 관료가 대신(大臣) 혹은 차관의 직무를 행하게 할 것 등이 제출되었다.

    그 밖에 토론에서 대한제국 황제가 일본 황제에게 양위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아직 시기상조라는 의견이 대부분이었고, 대한제국 황태자에게 양위하는 안에 대해서도 다수가 반대했지만 육군대신 데라우치 마사타케가 적극 주장하여 요강안에 반영시켰다. 고문(顧問) 제도를 폐지하고 통감부는 막료(幕僚) 기능에 한정시키며 나머지 기구는 모두 대한제국 정부 조직에 합병한다는 통감부 기구 개편안도 논의되었다. 또한 그 실행은 대한제국 황제의 결정에 맡기지 않고 양국 정부 간 협약의 형태로 추진하되, 황제가 동의하지 않을 경우 즉시 병합을 단행해야 한다는 데 대부분의 원로들이 동의했다.

    결국 사안의 중대성을 감안하여 외무대신 하야시 다다스(林董)가 직접 대한제국에 파견되고, 일본 내의 대외 강경론자들은 병합도 불사할 만큼 강경한 대한(對韓) 정책을 추진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기 시작했다. 도야마 미쓰루(頭山滿) 등 흑룡회(黑龍會) 인사들이 일본 의회에 제출한 대한 정책 의견이나 대동구락부(大同俱樂部), 유흥회(猶興會), 동지기자구락부(同志記者俱樂部), 헌정본당외교조사회(憲政本黨外交調査會), 일한동지회(日韓同志會) 등의 의견서들은 대부분 강경론의 입장에서 적어도 영국의 인도 정책, 프랑스의 안남(베트남) 정책과 같은 것을 실시해야 한다는 주장을 담고 있었고, 대한제국에 시찰단을 파견하여 실정을 조사함과 동시에 이토 통감의 책임을 추궁하자는 제안도 있었다.

    이런 와중에 대한제국 내각에서는 이완용과 송병준이 앞장서서 황제 폐위를 추진하고 있었다. 일본 측이 정권 위임이나 합병을 요구하기 전에 황제가 알아서 양위로써 사죄하는 것만이 대한제국이 살길이라는 주장이었다. 7월 16일에 열린 내각회의에서 마침내 황제 폐위가 결정되었고, 이완용이 입궐하여 고종에게 그 사실을 알렸다. 고종은 ‘짐은 죽어도 양위할 수 없다’고 거절하면서, 오히려 박영효를 궁내부대신으로 임명했다. 그래도 왕실의 부마였던 박영효가 나서서 이 위기를 타개해줄 수 있으리라 기대한 것이다.

    그러나 이토의 사주를 받은 송병준이 수백 명의 일진회원들을 동원하여 궁궐을 에워싸는 등 살벌한 분위기를 연출하면서 사태는 점점 고종에게 불리하게 진행되었다. 7월 18일 이완용의 집에서 열린 내각회의에서, 송병준은 황제가 거부하면 강제로라도 도장을 찍게 하는 수밖에 없다면서 옥새를 확보하라고 요구했다. 그것도 어려우면 우선 황태자 대리(代理)를 실행하기 위해 대리의 조칙안과 양위의 조칙안 두 가지를 마련하자고 제안했다. 이들은 오후 5시 입궐하여 이토의 고종 알현이 끝난 뒤 어전에 나아가 양위를 상주했다.

    고종은 단연코 거절하면서 궁내부대신 박영효를 불러오라고 했지만, 박영효는 병을 칭하며 오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고종은 새벽 5시에 이르러 비로소 황태자 대리의 조칙에 도장을 찍고 말았다. 이날 중명전 알현에 대신들은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 권총을 품에 숨기고 들어갔고, 황제도 황태자를 비롯한 다수의 궁내관들과 시신(侍臣)들을 불러 배석케 했다. 하지만 송병준은 이들을 모두 물리치고, 법부대신 조중응은 궁중과 외부의 연락이 가능한 전화선들을 모두 절단한 뒤 양위를 압박했다고 한다.

    7월 19일 마침내 황태자 대리의 조칙이 발표되었다. 고종은 어디까지나 황태자 대리를 선언한 것이지 양위하겠다고 한 것은 아니었지만, 일제는 7월 20일 오전 9시 서둘러 양위식을 거행했다.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제인 순종(李坧)의 즉위였다. 경운궁 중화전에서 거행된 양위식은 고종과 순종 황제가 직접 참석하지 않고 내관이 이를 대신하는 권정례(權停例)로 치러졌다. 일제는 세계 각국에 이 사실을 알리고 고종의 퇴위를 기정사실화했다. 12세의 나이로 왕위에 오른 지 44년 만에 고종은 마침내 파란만장한 역사의 무대에서 내려섰다.

    이 사실이 알려지자, 서울 시내 여기저기서 시민들의 통곡이 이어지고 수천 명이 모여 일본인들을 공격하는 폭동 사태가 연출되었다. 이완용의 집이 불태워지고 통감이 저격 목표가 되는 등 폭동이 계속되자, 정부 대신들은 신변의 위협 때문에 통감 관저에서 가까운 송병준의 집을 임시 내각회의 장소로 사용할 정도였다. 대한자강회, 동우회, 기독교청년회 회원들이 주도하는 시위 군중 2천여 명은 종로에 모여 연설회를 개최한 뒤 일진회 기관지인 국민신보사를 습격하고, 그중 일부는 경운궁 대한문 앞 십자로에 수백 명이 꿇어앉아 황제에게 결코 양위하지 말라고 애원하기도 했다.

    일제는 이런 군중 시위를 경찰과 주차군을 동원해 무자비하게 진압했다. 특히 시위대 제2연대 제3대대가 박영효 등과 연계해 양위 반대 쿠데타를 일으킨다는 첩보를 입수했다는 명분으로, 주차군 보병 제51연대 1개 대대를 7월 19일 밤 돌연 경운궁에 입궐시켜 왕궁의 일부를 점령했다.

    또 서대문 밖에 있던 포병 제17연대 1개 중대는 야포 6문을 이끌고 입성하여 남산 왜성대 위에 포열을 갖추고 서울 시내를 감시했다. 시내에 주둔하고 있는 대한제국 군인들이 저항에 나설 것에 대비한 조처였다. 기관포 2문을 가진 일본 군대가 군부(軍部) 화약고를 점령하고 용산의 육군 화약고까지 접수하여 탄약 보급을 차단한 것도 같은 우려에서였다. 이처럼 막강한 물리력을 동원한 일제의 제압으로 양위 반대 시위는 점차 수그러들고 말았다.

    [네이버 지식백과] 고종 황제의 강제 퇴위 (일제 침략과 대한제국의 종말, 2012. 4. 6., 서영희)


  • 안녕하세요. 황정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일본이 1905년 대한제국과 한일협약을 맺고 명분상으로 한국을 보호해준다고 공포했는데

    고종이 헤이그 밀사 사건을 일으켜 한일관계에 분란을 일으켰다는 책임을 물어 퇴위시켰습니다.


  • 일본이 고종을 강제로 퇴위시킨 사건은 1907년 '강제퇴위 사건'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 사건의 원인은 1905년의 의병 활동과 일본에 대한 국제적 항의의 증가, 그리고 특히 하계 올림픽에서의 국제적인 부끄러움을 일으킨 '헤이그 특사 사건' 등이 있습니다.

    1. 의병 활동과 국제적 항의: 조선이 고종 시대 후반에 진행된 의병 활동은 일본의 통치에 대한 저항의 표현이었습니다. 이에 대응하여 일본은 고종을 그의 권력에서 밀어내려고 노력했습니다. 이와 함께, 일본은 조선 국왕의 권한을 제한하고 그의 국제적인 영향력을 줄이려는 노력을 시작했습니다.

    2. 헤이그 특사 사건: 1907년에 이루어진 이 사건은 고종이 국제적인 항의의 일환으로 일본의 강제징용에 대해 항의하기 위해 헤이그 평화 회의에 특사를 보낸 것입니다. 하지만 이 특사는 일본에 의해 방해받았고, 이는 국제적인 부끄러움을 초래했습니다.

    이런 사건들을 이유로 일본은 고종을 강제로 퇴위시켰습니다. 일본은 퇴위의 근거로서 고종의 '정신적 불안정'을 주장했습니다. 이는 고종이 국가를 적절하게 이끌 수 없다는 의미였습니다. 이를 통해 일본은 고종을 강제로 퇴위시키고 그의 아들인 순종을 대신하여 왕좌에 앉힐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행동은 일본의 제국주의적 통치에 대한 저항을 불러일으켰고, 이는 결국 일본의 조선 통치의 종말로 이어지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