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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찬하늘소17723.07.28

고려 말에 요승이라 불리던 신돈은 어떤 인물이었나요?

고려 말기에 승려출신의 정치인이었던 신돈은 공민왕이 등용한 인물로 개혁가라는 평가도 있지만 요승이라는 평가도 공존하는데요.


신돈은 어떤 인물이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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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경제·금융전문가 조유성 AFPK입니다.

    ✅️ 신돈(* 편조스님)은 공민왕 때의 승려로, 공민왕에게 중용되어 공민왕의 개혁을 도왔던 신하라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신돈이 권력을 가짐에 따라 소위 '오만방자' 해졌고, 이를 탐탁지 않게 여긴 공민왕에게 결국 제거되게 됩니다.


  •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신돈은 본래 천민 출신이었으나 불자들 사이에 비범한 면이 있다 알려졌으며 김원명의 추천으로 공민왕에게 소개되었으며 공민왕과 여러차례 만나 수시로 정사에 관해 대화를 나누었으며 공민왕은 신돈을 총명한 사람으로 판단했습니다.

    1365년 공민왕의 신임을 받아 청한거사 라는 호를 하사 받았고, 사부로서 국정에 참여하게 되며 그 공으로 진평후 라는 작위를 받았습니다.

    당시 고려 말 사회는 구 귀족, 권문세가의 세도를 비롯해 여러가지 사회제도가 매우 왜곡되어있었는데 권문세가의 전횡이 극심해 왕권이 위축되자 공민왕은 마친 원의 세력이 약화되어 가는 틈을 이용해 개혁정치를 추진, 밖으로는 원의 지배, 간섭으로부터 벗어나려했고, 안으로는 원 세력의 힘을 등에 업고 세도를 부리는 권문세족을 척결하려 합니다.

    이때 왕의 신임을 받았던 신돈을 중용해 국내 개혁을 추진토록하며, 공민왕의 허락을 받아 가장 먼저 행한 것은 정계개편으로 기득권 세력을 몰아내고 이제현 등 새로운 신진사대부를 등용, 1366 고려의 토지와 백성을 바르게 개혁하는 관청인 전민변정도감을 설치해 개혁을 추진했습니다.

    권세가들이 부당하게 소유하던 토지를 원소유주나 농민에게 되돌려주고 억울하게 권세가의 노비가 된 사람들을 희망에 따라 자유화시키는 등 개혁정치를 했으며 1367년 성균관 중건으로 이색, 정몽주, 정도전 등의 개혁적 성향의 신진사대부들이 자신의 정치적 이념을 실천할수 있었고 신돈은 불자이면서도 성리학과 유교를 숭상했습니다.

    이러한 개혁은 주로 권문세족을 표적으로 한 결과 그들의 힘을 약화시킴으로 왕권을 강화 회복하는데 초점이 맞추어지며 이는 곧 국가의 기본 기강을 바로 잡는 중요한 일이었습니다. 왜곡된 사회제도의 개혁은 온당하나 그 척결 대상이 된 권문세족들에게는 비난과 배척의 대상이 되며 그들은 점차 신돈을 제거하지 않고서는 생존할수 없는 처지가 됩니다.

    신돈은 권문세족의 저항을 받게 되는데 1366년 정추와 이존오가 그를 비판했고 1367년 그를 제거하려는 모의가 있었으며 1368년 김정, 김흥조, 김제안 등이 그를 제거하려다 발각되어 유해되었다가 신돈에 의해 살해됩니다.

    그러나 권력의 핵심으로 부상한 신돈은 지지기반이 없었고 그에게 아첨하는 자들이 늘 주변에 있으면서 신돈은 자기관리에 소홀해지며 돈과 여자에 관련된 추문이 이어졌고 기득권 세력들에게 빌미를 제공하게 됩니다. 이러한 반대세력의 저항과 함께 국내외 정세도 신돈에게 불리하게 돌아갔고, 공민왕도 신돈을 의심하기 시작, 1369년 5도의 도사심관이 되려 하나 공민왕이 거부했으며 개혁정치를 추진했음에도 민생문제는 나아지지 않았습니다.

    새롭게 등장한 명에서는 신돈의 집권을 비판, 결국 공민왕은 1370년 친정의 뜻을 밝히고 신돈 집권 시대는 끝이 납니다.

    얼마 뒤 이인이라는 자가 신돈이 역모를 획책한다는 투서를 재상이었던 김속명에게 보냈고 이 것을 보고하자 공민왕은 신돈과 관련자를 잡아들이고 이 사건으로 수원에 유폐되었다가 1371년 처형되었습니다.


  • 안녕하세요. 이상훈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고려 말에 혜성처럼 등장해 공민왕의 총애를 입어 절대 권력을 쥐게 된다. 신돈은 부패했던 고려를 개혁시키기 위해 여러가지 좋은 정치를 하기 시작했지만 권력에 취해 타락하기 시작한다. 신돈의 평가는 개혁가이면서 요승이라는 두 얼굴을 가진 인물이였다. 또한 당시 우왕은 공민왕의 아들이 아닌 신돈의 아들이라는 소문이 돌았다. 그래서 신우라고 훗날 이성계는 불렀다고 한다.

    신돈은 '고려사'에 어머니에 대해서만 전해진다. 그의 어머니는 옥천사라는 절의 노비였으며, 신돈은 어린 나이에 출가함으로 '편조'라는 법명으로 승려가 되었다. 승려의 삶이 어떤 삶이었는지 기록은 없다. 다만 신분과 상관없이 당시의 시대적 상황은 스님들은 백성들의 칭송을 받았다. 그래서 그는 훗날 개경에 있는 현화사의 주지가 된다. 그러던 어느날 공민왕은 꿈을 꾸게 되고, 꿈에서 자신을 죽이려고 하는 순간, 어떤 승려가 자객을 물리치고 구해준다는 꿈이었다. 그리고 신돈을 만나게 되는데, 꿈에서 본 자와 흡사하게 비슷하고, 그의 뛰어난 언변으로 인하여 궁궐로 등용시키게 된다. 불교에 심취한 공민왕은 신돈에게 개혁에 대한 전권을 위임하고 자신은 불교에 심취하게 된다. 권력에 욕심을 가지게 된 신돈은 날이 갈수록 포학해지고, 가격해지기 시작했다. 신돈은 사치와 향락, 주색에 빠지고, 부정축재, 부패 등 온갖 쓰레기같은 막장 행보를 보이게 된다. 점점 욕심이 수면에 들어나자 공민왕은 부담스러워하기 시작하였고, 결국 반역을 꾀한다는 편지로 신돈의 머리는 효수되어 백성들의 본보기로 삼는다. 사지는 잘려 각 지로 흩어졌다.


  • 안녕하세요. 정준영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고려 공민왕(恭愍王)때 개혁정치를 담당했던 승려. 본관은 영산(靈山). 승명은 편조(遍照), 자는 요공(耀空).


    돈(旽)은 집권 후에 정한 속명(俗名)이며, 왕이 내린 법호로 청한거사(淸閑居士)가 있다. 어머니는 계성현(桂城縣) 옥천사(玉川寺)의 노비였으며, 노비가 중이 되는 것을 금했던 당시에 어머니가 노비인데도 어려서 중이 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아, 그의 아버지는 영산의 유력자였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어머니 때문에 신분적으로 천한 위치에 있어 주위의 용납을 받지 못하고 늘 산방(山房)에 거처했다. 1358년(공민왕 7), 왕의 측근인 김원명(金元命)의 소개로 공민왕을 처음 만나게 되어 궁중에 드나들기 시작했으나 그를 배척하던 무장세력의 방해로 피신해 있다가, 1364년 「청한거사」라는 호를 받고 사부가 되어 국정의 자문을 맡았다.


    공민왕은 1356년의 반원(反元) 개혁정치 시도 이후 몇 번의 위험한 고비를 넘기고, 이 무렵 점차 안정을 되찾게 되면서 다시 개혁을 시도하기 위해 신돈을 등용했던 것이다. 신돈의 등용은 권문세족의 영향에서 벗어나 소신껏 개혁을 추진할 수 있는 사람으로 인식되었기 때문이었다. 신돈은 마침내 1365년 5월, 최영(崔瑩) 등 무장세력을 비롯하여 많은 권문세족을 몰아내고 개혁을 추진해 나갔다. 인사권을 포함한 안팎의 권력을 총괄했을 뿐 아니라, 왕을 대신해 백관(百官)들의 조하(朝賀)를 받고, 출입할 때는 그의 의례가 왕과 비슷할 정도였다. 이렇게 강력한 권력을 쥐게 되자 중국에서는 권왕(權王)으로 알려졌고, 관료들에게는 영공(令公)으로 불렸다. 그가 집권하던 시기의 정치변혁으로는 우선 내제추제(內帝樞制)의 신설을 들 수 있다. 이는 일부 선발된 재신(宰臣)과 추밀(樞密)이 궁중에서 나라의 중대한 일을 처리하도록 한 변칙적인 제도로서, 권문세족이 중심이 된 도평의사사(都評議使司)를 약화시키고 왕권의 강화를 꾀하려는 기구라는 데 의의가 있었다. 1366년에는 전민변정도감(田民辨整都監)을 설치해 사회경제적인 개혁도 적극 추진했다. 이 기구는 부당하게 겸병당한 토지와 강압에 의해 노비가 된 사람들을 원래의 상태로 되돌리기 위해 설치한 것으로, 자신이 직접 판사를 맡은 것만 봐도 그가 이 사업에 얼마나 힘을 쏟았던가를 알 수 있다. 그 결과 권문세가들이 빼앗았던 토지를 주인에게 돌려주고, 노비가 된 자를 원래의 「신분으로 되돌려준 경우가 많이 나타났다」는 찬양을 받기도 했다.

    또한 1367년 숭문관(崇文館) 옛터에 성균관을 다시 지었는데, 이는 성리학의 전래·확산 및 신진사류(新進士流)의 성장과 밀접한 관련을 갖는다. 사실 이 무렵에 이색(李穡)을 정점으로 정몽주(鄭夢周)·이숭인(李崇仁)·정도전(鄭道傳)·권근(權近)·윤소종(尹紹宗)·임박(林樸) 등 일군의 신진 문신세력이 등장하고 있었다. 이들의 신돈에 대한 태도는 한결같지 않았지만 대체로 현실을 시인하고 참여해 그 속에서 자기성장을 이루어 나갔고, 신돈도 그들과의 적극적인 협조를 모색했던 것으로 보인다. 신돈의 정치·사회·경제개혁의 단행은 당시 지배층의 많은 반발 속에서 이루어진 것이었고, 결국 그들은 신돈을 없앨 모의를 하게 되었다. 1369년 신돈은 스스로 5도(道)의 도사심관(都事審官)이 되려고 사심관 제도를 부활시키려다 좌절되었는데, 이는 자신의 세력기반을 확립하려고 시도했던 일로 보인다. 1370년 말부터 그 동안 정치일선에서 물러나 있던 공민왕이 친정(親定)을 시작하지만, 신돈은 태후 및 그와 연결된 권문세족의 공격을 받아 반역의 혐의로 수원으로 유배되었다가 1371년 7월, 마침내 그곳에서 처형되었다.

    출처 : 한국고중세사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