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영실과 세종의 연이 끊어지게 된 계기가 가마인가요?
역사시간에 배운 내용으로 세종과 장영실은 끈끈한 관계였었는데, 장영실이 만든 가마를 세종이 타다가 부서져서 둘의 연이 끊어지게 됐다는 게 사실인가요?
안녕하세요. 이주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관노출신의 노비 장영실은 종4품의 벼슬까지 올라 갔습니다. 벼슬은 세종때 부터 시작하였는데. 세종대왕은
장영실의 탁월함과 천재성에 가장 큰표를 던져 주었던 분이었습니다. 그리고 세종대왕은 장영실을 그의 가장
측근에 두어서 자기의 뜻을 펼칠 수 있었다고 보아도 무방하죠. 그렇게 신하로써 왕으로써 서로를 알아 주고 믿어
주는 관계가 였으나, 관노의 신분이었던 사람을 어떻게 벼슬을 하사하느냐는 신하들의 반대는 늘 따라다녔습니
다. 그러나 세종대왕의 일언지하에 물리쳐 졌고, 결국 종4품의 벼슬까지 올라 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장영실은 세종대왕과 함께 우리나라의 과학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하게 된다. 측우기, 자격루, 수포, 기중
기 등등.. 많은 발명품을 만들어 냈으나, 님이 말하신 바로 어가 임금이 타는 가마가 장영실이 제일 마지막으로
만든 발명품인데요 장영실은 그당시 아주 가벼운 어가를 만들기위해 노력을 하였다 합니다. 그것도 아주 가볍게
만들기 위해 무단히 노력하였다고 하는데요, 그러나, 이것이 장영실을 역사의 기록에서 완전히 사라지게 하는
아주 큰 사건이 되고 말았습니다. 처음 그 어가에 올라탄 세종은 그만 어가가 뿌러지는 바람에 대신들 앞에서
엉덩방아를 찧고는 당시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 벌어지고 만겁니다. 임금 몸에는 상처하나 내서는 안돼는 조선
대궐의 법도가 정하여 진 탓에 장영실은 그 사건으로 인하여 곤장 100대를 받았으나, 세종대왕의 명에 의하여
20대를 빼고 80대를 맞고 장영실의 신분에 노골적인 불만을 가진 양반가의 관리들은 이때다 싶어 관직을
박탈 당하고 결국 관직과 궁을 떠 날 수 밖에 없었다고 합니다. 그 후 장영실에 대한 기록은 어디에도 나오질 않게
됩니다. 가마가 부서진 일 정도로 질문자께서 말하시나 그 당시 그많은 발명품을 만든 장영실이 어가를 그리
허술하게 만들었을지 솔직히 의문이며, 노골적인 반대파 사람들의 장영실을 쫓아 내려 담합이 있었을 것으로
추측 되어 지고 또한, 왕의 몸에 상처를 입혔기에 왕실의 법도를 내세워 중신들의 요청과 세종대왕도 그를 오히
려 더이상 피해를 입지 않게 하기위해 보호하기 위함이 더 있었을 것이며 장영실 또한 관직에서 물러나려는
의지가 확고 했던 것으로 보여 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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