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넉넉한키위191
넉넉한키위19123.10.22

80년대에 북한이 우리나라에게 물자원조를 한 이유가 무엇인가요?

80년대 남한이 북한에게 대규모 물자원조를 받은 배경이 있더군요.

그렇다면 그 당시 무슨일이 발생하였고 왜 북한은 우리나라에게 물자원조를 한것인지 궁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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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변의 개수4개의 답변이 있어요!
  • 안녕하세요. 박남근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1984년 서울 및 중부지역에 집중호우로 최악의 홍수가발생 하여

    서울 강동구일대 전역이 물바다가 되었고 강동구청 과 강동경찰서가 침수 경찰서 유치장 과 서울중앙병원등 칭수되는 재난발생

    당시 전두환 전대통령은 북한이 남한에 홍수 물자지원제의를 하자 정부는 접십자사로통해 수락하였는데 물자양의 많고 적음을 떠나 남북협상 실마리를 풀기위한 조치였습니다 . 북한이 정치선동적으로 지원한다고 한것을 우리가 받아드리자 북한은 중국에서 까지 물자를 들여왔다고 합니다. 이 협상으로 현대그룹 정주영회장의 방북이 성사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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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1984년 9월 말과 9월 초 서울, 경기, 충청 일대에 쏟아진 집중호우로 최악의 인명과 재산 피해가 발생하자 북한은 남한 수재민들에게 수재물자를 제공하겠다고 제의합니다.

    1984년 8월 31일부터 9월 4일까지 서울, 경기, 충청 일대에 쏟아진 집중호우로 물난리가 나고 엄청난 인명과 재산 피해가 발생, 당시 서울의 하루 최다 강우량은 294.8mm로 기상대 창설 이후 최고 기록을 세웠고 한강이 위험수위인 10.5m를 넘었고 한강대교 등 4개의 차량통행이 전면 통제되었으며 저지대인 강동구 풍납동과 성내동 등지의 주택들이 물에 잠겼고 초, 중, 고는 물론 대학교까지 휴교령이 내려집니다.

    전국적으로는 사망 및 실종 189명, 이재민 35만 1000명, 부상 153명에 피해핵은 1,333억원에 달했습니다.

    1984년 9월 8일 북한적십자회는 방송을 통해 동포애와 인도주의 입장에서 남한의 이재민에게 수재물자를 제공하겠다고 제의하며 수재물자 품목을 쌀 5만석, 천 50만m, 시멘트 10만t, 기타 의약품 등으로 자세히 밝히는데 당시 전두환 정부는 북한의 제의를 남북대화의 돌파구로 여는 계기로 삼기 위해 대국적 차원에서 받아들이기로 결정합니다.

    당시 남한 정부에서는 북한이 체제 우월성 과시와 함께 빚을 지게 만들어 후일 무언가 요구하기 위한 정치공세라며 거절하자는 의견이 많았으나, 받아들였는데 북한은 후에 이를 최대한 정치적으로 활용합니다.

    헐벗고 굶주린 남조선 수재민들이 우리의 구호물자가 하루빨리 도달할 것을 학수고대하고 있다는 식의 허위 보도까지 하며 국내 선전에 안간힘을 쓰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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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유영화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1984년 여름 집중 호우로 서울과 경기도 일대의 홍수 피해가 계기입니다. 당시 집중 호우로 사망자 189명, 실종자 150명, 재산피해 2502억, 이재민 230만명의 피해를 입었습니다.

    이에 북한은 83년 아웅산 폭탄 테러에 대한 화해 제스쳐로 북한 적십자를 통해 쌀 5만석, 옷감 50만 미터, 시멘트 10만톤, 의약품을 제공하겠다고 제의하고 이를 전두환 정부와 남한 적십자가 수용하면서 가능했습니다. 1984년 9월 29일에서 10월 4일까지 물자를 제공받았습니다. 그러나 제공된 물품이 조악하고, 전달 과정에서 사고가 나기도 했습니다.

    상호 전달 과정에서 남북한 모두 체제 선전 도구를 활용되었습니다. 남한은 구호 물품을 전시하고, 물품을 전달한 트럭에 남한에서 생산된 전자제품 등 공산품을 실어 되돌려 보내기도 하였습니다. 그렇지만 분단 이후 최초의 남북 경제 교류이고, 상호 화해 분위기를 조성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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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1984년 9월 초까지 한반도에는 연일 쏟아진 엄청난 폭우로 인명과 재산 피해가 상당했다고 합니다. 서울의 하루 강우량은 300mm 정도였다고 합니다. 그 해 8, 9월에는 南北간에 서로 물자를 지원하겠다는 공방전이 치열했지요. 남한에 물자를 보내겠다고 제의한 것인데 당시 북측이 우리에게 보내겠다는 물자는 쌀 5만 석, 시멘트 10만 톤, 직물 50만 미터, 의약품 등으로 우리와 마찬가지로 수재를 입은 그들로서는 감당하기 힘든 것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우여곡절 끝에 9월29일, 판문점을 시작으로 9월30일, 각각 인천항과 북평항으로 수재물자가 도착하였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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