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예는 왜 왕건에게 왕을 뺏긴건가요?
후삼국시대 가장 세력이 컷던 후고구려는 궁예가 세웠고 왕건은 수하인 장수였는데요 고려가 건국될땐 왕건이 왕을 하게 되는데요 궁예는 왜 왕에서 물러난건가요?
안녕하세요. 임지애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궁예의 태봉국은 왕건을 비롯하여 신라말 부터 6두품들과 지방 유지들이 손 잡으면서 생긴 호족들이 지지기반이였습니다. 이 호족들은 그 지방내에서는 강한 권한을 가지고 있었고 그마다 특색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태봉국 궁예는 양길에게서 나와 그 양길의 일부 세력과 결탁하여 나라를 세웠기 때문에 궁예의 직계 세력은 소수라고 볼 수 있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궁예의 왕권은 점점 호족들에 밀렸고 궁예가 왕권을 강화시키기위해 불교를 내세우거나 숙청하게됩니다. 이런 상태에서 호족들의 반발을 사게 되었으며 이 중 왕건이 발탁됩니다. 따라서 궁예는 지지기반이였던 호족들의 반발로 인해, 호족들이 왕건을 추대하며 왕으로 내세운 것입니다.
만족스러운 답변이었나요?간단한 별점을 통해 의견을 알려주세요.안녕하세요. 정준영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47대 헌안왕(憲安王) 또는 48대 경문왕(景文王)의 아들로 전한다. 그가 태어나자 여러 가지 현상이 일어나자 일관(日官)이 장차 국가에 이롭지 못할 것이니 기르지 말라고 하여 중사(中使)를 보내어 죽이라고 하여 그가 아이를 루(樓)에서 던졌는데 밑에서 유모인 비자(婢子)가 받아 숨어서 길렀다. 나이 10여세 되면서 유희(遊戱)가 심하므로 유모가 장차의 일을 걱정하자 홀로 떠나 풍덕에 있는 세달사(世達寺 : 지금의 흥교사(興敎寺))로 가 중이 되어 선종(善宗)이라 하였다. 자라서는 승려의 계율(戒律)에 구애하지 않고 기상(氣像)이 활발하며 담기(膽氣)가 있었다. 나라가 어지러워지자 진성왕(眞聖王) 5년(891년) 적괴(賊魁) 기훤(箕萱)에 귀의했는데 예우하지 않으므로 동 6년 북원(北原 지금의 원주(原州))의 도적인 양길(梁吉)에게 가서 부장(部將)이 되어 강원도 일대의 현성(縣城)을 격파하고 군사의 위세가 높아지자 52대 효공왕(孝恭王) 5년(901년) 스스로 개국하고 국호를 고려라 하였다가 동 8년 국호를 마진(摩震, 이병도 님은 마가진단(摩訶震旦) 곧 대동방국(大東方國)이라 해석함), 연호를 무태(武泰)라 하였다. 동 15년(911년) 국호를 태봉(泰封)이라 하고 연호를 수덕만세(水德萬歲)라 하였다. 54대 경명왕(景明王) 2년(918년) 궁예는 의심이 많아지고 포악해져 보좌관을 비롯 평민에 이르기까지 죄없이 주륙(誅戮)당하는 사람이 자주 생기자 민심이 변하므로 도망가다가 부하에게 피살되었다.
출처 : 한국 고대 인명사전
만족스러운 답변이었나요?간단한 별점을 통해 의견을 알려주세요.안녕하세요. 노인옥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후삼국시대에 가장 강력한 세력은 궁예가 세운 후고구려였습니다. 궁예는 발해가 멸망한 후에 후고구려를 건국했는데 많은 영토를 정복하고, 신라와 후백제를 위협했습니다. 하지만 궁예가 초심을 잃고 폭정을 하자 그의 수하였던 왕건은 이에 반발하고, 신라와 동맹을 맺어서 후고구려에 저항했습니다. 결국 왕건은 궁예를 물리치고, 고려를 건국했습니다.
궁예가 왕건에게 왕을 뺏긴 이유에 대해 일부 역사학자들은 궁예가 왕건의 충성을 저버리고 권력욕에 눈이 멀어 폭정을 일삼았기 때문이라고도 하고 다른 역사학자들은 궁예와 왕건 사이의 정치적, 종교적, 문화적 차이가 갈등의 원인이었다고 보고 있습니다.
제 답변이 질문자님께 도움이 되셨길 빕니다.
오늘 하루도 즐겁고 행복한 하루가 되시길^^
만족스러운 답변이었나요?간단한 별점을 통해 의견을 알려주세요.안녕하세요. 한정현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궁예는 재위 말년에 가혹한 폭정을 실시했는데 각종 전쟁과 후삼국의 정치를 겪으며 오늘날 의학적 개념으로는 편집성 성격장애와 같은 정신병이 발병하였고 망상, 환각, 의심 등의 행동 이상이 악화되면서 무자비한 폭군이 된 것으로 보입니다.
이렇게 무자비한 숙청에다 독선적인 정치 철학에 염증을 느낀 왕건의 역성혁명으로 축출되어 비참한 최후를 맞았습니다.
만족스러운 답변이었나요?간단한 별점을 통해 의견을 알려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