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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만좀합시다
그만좀합시다23.08.15

왕건이 궁예를 축출할 수 있었던 이유가 무엇인가요?

궁예를 몰아내고 왕권이 왕위를 차지할 수 있었던 이유가 무엇인가요? 당시에도 여전히 궁예를 따르던 이들이 있었을텐데 이미 왕건이 군권을 모두 장악하고있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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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변의 개수4개의 답변이 있어요!
  • 탈퇴한 사용자
    탈퇴한 사용자23.08.15

    안녕하세요. 임지애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왕건이 고려의 왕이 된 과정은 다음과 같습니다.

    궁예는 고구려를 계승한다는 명분을 접고 스스로를 신라 왕실의 후예라 하면서, 금성(경주)을 “멸도”라고 부르며 자신이야말로 타락한 신라를 무너뜨리고 새로운 세상을 창시할 구세주라고 일컬었습니다. 그리고 힘이 커진 호족과 장수들을 반역죄로 처형했습니다. 왕건도 여기에 말려들어 하마터면 죽을 뻔하였으나, “내 관심법으로 보니 네가 반역을 꾀했다”라는 궁예의 힐문에 오히려 “그렇습니다. 제가 감히 역모를 꾸몄습니다. 죽여주십시오.” 하자 궁예가 정직해서 용서한다며 벌은커녕 상을 내렸다고 합니다.

    가까스로 모면했지만 언제 궁예의 손에 숙청될 지 모르는 일, 게다가 고려를 세운 절반의 지분이 있다고 여기는 상황에서 궁예가 독재의 길을 치달으니, 그에게 남은 선택은 하나밖에 없었습니다. 왕건은 홍유ㆍ배현경ㆍ신숭겸ㆍ복지겸ㆍ박술희 등과 모의하여 918년에 궁예를 내쫓고 스스로 고려의 주인이 되었습니다. 기록에 따르면 당시 왕건은 쿠데타에 반대하며 궁예에게 충성하려 했으나, 홍유 등이 간곡하게 부추기고,부인 유씨가 “의로운 군사를 일으켜 포악한 임금을 없애는 일은 예부터의 일이다”라며 손수 갑옷을 가져와 남편에게 입혀 마지못해 거사했다고 적혀 있다. 하지만 아마도 이는 왕건을 미화하려고 나중에 만들어진 말일 것이고, 실제로 왕건은 거사에 앞서 수도에 “왕건이 왕이 된다”라는 참언까지 퍼뜨리며 적극적으로 쿠데타를 준비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또한 궁예가 쫓겨나 죽은 다음 이흔암ㆍ환선길ㆍ진선 등의 반란이 꼬리를 물었고, 옛 백제 지역으로 고려에 복속해오던 공주 이북의 30여 성이 한꺼번에 후백제에 투항한 점을 보면 “궁예가 포악해서 널리 민심을 잃었고, 왕건이 대신 왕이 되자 온 나라가 한마음으로 환호했다”는 기록은 현실과 거리가 있었을 것입니다. 아무튼 이로써 42세의 나이에 왕위에 오른 왕건은 한동안 흐트러진 기강과 민심을 바로잡고, 북방의 위협(당시 발해가 쇠퇴하며 거란이 새로운 강국으로 성장하고 있었다)에 대비하느라 통일전쟁에서는 한발 물러서 있게 되었습니다. 그 사이에 견훤의 후백제가 기세를 올렸습니다.


  • 안녕하세요. 이주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궁예는 신라를 멸도라 일컫고, 투항한 신라인을 모조리 죽이는 등 전제군주로서 횡포가 심하였습니다. 자신의 지위를 합리화하기 위하여 미륵신앙을 이용하였는데, 자신은 미륵불, 두 아들은 청광보살·신광보살이라고 칭하였습니다. 915년에는 부인 강씨와 두 아들을 살해한 후, 반궁예 세력에 대한 정치적 숙청이 이루어졌으며, 백성을 괴롭히는 등 호탕방일한 생활을 하였습니다. 이와 같이 폭군으로 전락한 그는 부하인 신숭겸(申崇謙)·홍유(洪儒)·복지겸(卜智謙)·배현경(裵玄慶) 등이 왕건을 추대하자 도망가다 평강에서 백성에게 피살되었습니다.

    민심을 잃어 결국 백성에게 맞아 죽은걸로 묘사되네요


  •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궁예는 자신을 미륵불이라고 생각해 신격화 하려고 했고 자신이 좋아했던 사람들만 우대해서 폭정을 계속했고 궁예의 폭정으로 궁예를 몰아내려는 사람들이 왕건을 지지했습니다. 그 후 왕건은 호족득의 지지를 받으며 궁예를 몰아내고 마침내 고려를 세우게 된 것 입니다.


  • 안녕하세요. 강경원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그놈의 관심법때문아닌가요? ㅋㅋ 자기가 부처니 관셈보살이니 하면서 집권말기 불안한 심리를 대변한 공포정치로 민심을 다 잃어서 그런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