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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퇴한 사용자
탈퇴한 사용자23.06.30

조선시대 기술교육기관에는 어떤것들이 있는지 알려주세요.

조선시대에 기술교육은 대개 중인을 대상으로 하였고 여기서 교육받은 사람들은 잡과를 거쳐 기술관에 등용되었다고 하는데요. 궁금한게 이 시대에 대표적인 기술교육 기관은 어떤것들이 있는지 알려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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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단정한낙지284
    단정한낙지28423.06.30

    안녕하세요. 신현영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조선 왕조가 세워지면서 문무관 중심의 양반 관료 체제가 굳혀지게 되면서, 기술적인 역할을 수행하는 기술관은 중인 신분에서 영향력을 얻게 되었습니다. 중인 신분 이외에 양반 계층에서 타락한 서얼 및 양인 신분에서도 기술관으로 일하게 되었습니다.

    1392년에 입관보리법이 제정되었는데, 이에 따르면 7과(과목) 중에서 기술과에 해당하는 것은 역과, 의과, 음양과, 이과의 4과였습니다. 이과와 역과가 신설되었지만, 고려시대의 잡과에서는 율, 서, 산, 삼례, 삼전, 하론이 없어지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조선 초기의 4과 중에서 이과는 사라지고, 대신 율과가 추가되어 기술과는 역과, 의과, 음양과, 율과로 정착되었습니다.

    요약하자면, 조선 왕조 시대에는 기술적인 역할을 하는 기술관이 중인 신분과 타락한 양반 신분에서 영입되었으며, 기술과는 역과, 의과, 음양과, 율과로 구성되었다고 할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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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임지애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조선 시대에는 기술 교육을 담당한 별도의 교육 기관이 아예 존재하지 않았으며, 기술 교육은 중앙 및 지방의 해당기술관청에서 수행하였습니다. 율학(법률 기술)은 형조(고려 국자감), 서화는 도서화(고려는 국자감), 산학은 호조(고려는 국자감), 명과학(음양, 천문학)은 관상감(고려는 사천대), 도학은 소격서(고려는 태사국), 역학(외국어)는 사역원(고려는 통문관), 의학은 전의감(고려는 태의감) 등입니다. 그리고 조선시대 통역, 의학 등 기술교육을 위한 학교는 없었으며 해당관청에서 교육하도록 했습니다. 기술학은 평민 자제들이 많이 배웠으나 의학, 역학은 양반 자제들도 배웠다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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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김종호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조선 시대의 기술 교육은 주로

    중인들이 담당했는데, 해당 관청에서

    교육을 했습니다.

    의학은 전의감, 천문·지리는 관상감,

    외국어는 사역원에서 담당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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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한정현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조선시대는 문무관 중심의 양반관료체제가 형성되어 기술직 전담 계층은 중인 신분이 자리잡게 되었다. 기술관의 신분은 중인층 이외에 양반계층에서 도태된 서얼 및 양인(良人) 신분에서 충당되었다.

    1392년(태조 1) 8월에 제정된 입관보리법(入官補吏法)에 의하면, 7과(科) 중 기술과, 즉 잡과에 해당하는 것은 역과(譯科)·의과·음양과·이과(吏科)의 4과였다. 이 4과는 고려시대의 잡과에 비하면 율(律)·서(書)·산(算)·삼례(三禮)·삼전(三傳)·하론(何論)이 없어지는 대신 이과와 역과가 신설된 것이었다.

    그러나 그 뒤에 조선 초기의 4과 중에서 이과가 없어지는 대신 율과가 추가되어 조선시대의 기술과는 역과·의과·음양과·율과로 정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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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정준영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조선왕조는 기술관을 양성하기 위하여 정규의 과거와 취재법 이외에, 여러 장학제도를 두어 정책적으로 기술학의 진흥을 꾀하였다. 특히, 조선 초기에는 농촌경제의 안정과 여러 문화정책의 성과에 힘입어, 기술과학의 진보도 괄목할 만한 것이었다.


    먼저 농법에서는, 세종 때의 ≪농사직설 農事直說≫을 포함한 각종 농서의 보급으로 우리 나라 풍토에 적합한 농경방법의 개발이 활발하게 모색되었다. 또한 세종 때를 전후해서 농업과 관계가 깊은 천문기상학이 크게 발달하였다. 1442년(세종 24)에 만든 측우기는 서양보다도 200년이나 앞선 선진적인 것이었고, 그 밖에 대간의(大簡儀)·혼천의(渾天儀)·자격루(自擊漏) 등도 당시 왕성한 기술과학의 발달을 잘 대변해 주고 있다.


    또한 의학 분야에서는 1433년에 ≪향약집성방 鄕藥集成方≫이 편찬되어 독자적인 의법(醫法)을 수립하였고, 각종 편찬사업의 추진은 인쇄술의 급속한 발전을 가져오게 하였다.


    한편 국내에서 기술이 축적되어 있지 않은 분야는 귀화인에게서 그 기법을 전수받거나, 사신 편에 장인을 수행하게 하여 중국 기술을 배워오게 하였다.


    그러나 기술학은 초기의 괄목할 만한 성장에도 불구하고, 그 지속적인 발전을 저해하는 근본적인 한계점을 가지고 있었다. 먼저, 양반관료 중심의 정치구조 속에서 기술직은 중인층 이하의 하급관리로 충당되어 사회신분적 차등을 감수해야만 했다.


    또한 무농억말(務農抑末)의 유교적 이념이 지배하는 사회조건하에서 기술직을 천시하는 경향은 점차 심화되었다.


    실제적인 기술 담당층인 장인들은 대부분 노비 신분으로 구성되었고, 따라서 그들에 의한 전문 기술과학의 이론적·원리적 발전을 기대하기는 매우 어려운 형편이었다.

    이들 장인 계층의 기술 전수는 대부분 구전비법과 경험적인 방법을 전하는 범주에 한정될 수밖에 없었다. 또한 이들 장인 계층은 관장제(官匠制) 아래 예속되어 사장(私匠)의 활동이 정책적으로 제약되었으므로, 독자적인 기법 개발과 창의성 발현이 근본적으로 제약되었다.


    특히, 초기에 명나라의 과중한 금은 조공의 압박을 벗어나기 위한 정책적 폐광 조처는 공업발전의 토대를 약화시켰고, 화폐경제의 발전을 정체시키는 요인이 되었다. 또 농촌경제는 자급자족적인 경제체제가 구축되어 시장경제체제로의 편입이 지연되었고, 이에 수공업이나 광범위한 산업발전의 토대가 성숙되기 어려운 실정이었다.


    이러한 근원적 배경으로 인해 관수용(官需用)을 중심으로 제한적인 상권만이 공장(工匠)들과 연결되어 발전하였다. 이들 상인들은 후일 보부상(褓負商)이라는 전국적인 상인조직단체가 생기기 전까지는 주로 관설상가(官設商街)인 육의전(六矣廛)의 관납상역(官納商易)에서 벗어나지 못한 상태로 있었다.


    이것은 곧 수공업자들도 관장수공업(官匠手工業)을 중심으로 하는 공장제도에 얽매여 위축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그러나 일반 민간의 수요를 위한 수공업이 아주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일반 백성은 도공·야장(冶匠) 등의 수공업 노동이라든가 농촌의 일상생활에서 길쌈 등의 제작활동을 통해 수요를 충족하였다. 이러한 수공업 노동은 대체로 농민의 부업으로 이루어진 것이 많으나, 승려 또는 사장인 도공·야장들의 수공업 노동도 거의 전업적(專業的)인 것이었다.


    그러나 당시의 수공업 노동으로서는 그 규모와 기술면에서 관장들의 그것이 큰 비중을 가진 것이었고, 사장(私匠)의 경우 관장수공업하에서 침체를 면하지 못하였다. 즉, 사장의 경우 제작과정에서의 참여 및 가격 통제 등 각종 관의 간섭을 받았다.


    그러나 후기에 이르러서는 관장수공업의 쇠퇴와 더불어 사장수공업이 발달하였으며, 종래에는 전적으로 관장에만 의존하던 관수도 차차 사공임용(私工賃用)으로 전환되었다. 이러한 사장수공업의 발달은 특히 17세기 후반 이후 상업의 발달[鄕市·場市]과 관련된 것이며, 공인들의 방납제(防納制)가 결과적으로 교환경제의 발전에 공헌하게 되었음을 뜻하는 것이다.


    조선시대 기술교육의 실상과 변천 양상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공장제도(工匠制度)에 대한 성격 규명이 요청된다. 조선 초기 공장의 신분 구성은 대체로 관노(官奴)와 천역양인(賤役良人)이 주가 되었다.


    한편, 지방 공장인 경우에는 고려시대의 천민이나 귀화인들의 집단 부족으로서 향(鄕)·소(所)·부곡(部曲) 출신이 주가 되었다. 이들은 국가가 필요로 하는 금·은·구리·철·종이·도기·먹 등을 만들기 위한 천민 집단이나 죄인으로 이루어진 특수 집단이었다.

    때로는 각 관아의 일반 노비로서 공장으로 편입된 예도 있었다. 이들은 노비 신분으로서 그 신역(身役)을 지는 방법으로 기술 계통에서 여러 작업에 종사하였고, 대개 어렸을 때부터 편입되어 기술을 습득하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들 대부분의 공장은 사습자(私習者)가 없었으므로 각 사(司)의 어린 노자(奴子)로써 충당시켜 기성 공장에 결원이 생길 때마다 보충하도록 하였다. 이러한 노비 출신의 보충제도는 1434년(세종 16)에 와서는 양인 출신의 기술인으로 충당시켜 분번입역(分番立役)하게 하였으며, 점차적으로 정원 충원은 양인 가운데 능력 있는 자를 보충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이처럼 공천(公賤)과 함께 양인들이 공장으로 진출하게 되자 천인 출신이 주를 이루던 공장을 대신하여 양인이 수공업계의 주인공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따라서 조선시대의 수공업은 노비 노동적 성격을 벗어나 양천병행(良賤竝行) 내지 양인 중심으로 점차 이행되었다.


    초기의 공장 가운데에는 체아직(遞兒職:현직을 내놓은 문무관에게 주는 벼슬)을 배수받고 정식으로 관원[국가 기술요원]이 되는 자도 있었다. 관료국가적 체제하의 하층인에게 체아직은 소망하는 벼슬이었으며, 또한 제품 시장을 거의 갖지 못했던 공장들에게는 그 기술을 정규적으로 행함으로써 받는 급료로 호구책을 마련할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하였다.


    관장제의 경우, 체아직을 받고 정규적인 국가의 기술 요원이 되어 그 제작활동 일체가 관가에 의해 관장되는 형태와, 규정 기간을 관역에 종사하고 나머지 시간은 자유기업[私營]에 종사하는 형태로 분류되었다. 또한 공장은 그 거주지별·등록지별로 경공장과 외공장으로 양분되었다.


    경공장이란 한성부의 장적(帳籍:호적)에 등록되어 중앙 정부에 소속되어 있던 공장들을 가리키며, 30개 아문에 129종이 있었다. 외공장은 지방 관아에 등록되어 야장과 같은 일부 공장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이 농업을 경영하였으며, 다만 장적에 등록되어 일정한 기한을 관역에 종사하였다.


    외공장은 27종에 지나지 않았는데, 이는 지방이 중앙에 비해 수요 품목이 적었음을 보여준다. 공장의 기술 전수는 직종별로 이루어졌으나, 조선 후기에 들어와서는 관장제가 왕조체제의 이완과 구조 개편으로 인해 붕괴되어 감에 따라, 직종별 전수제도도 크게 위축되었다.


    이 때문에 기술 전수는 사장들을 중심으로 특정인이나 가계(家系) 내부에서 이루어지는 폐쇄성을 띠게 되었다. 조선 후기에는 사장들의 기술 축적이 이미 관장을 능가할 만큼 발전하였고, 일반민의 수공업품 수요도 증가하여, 사장이 후기 수공업계의 주체로 등장하였다.

    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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