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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리무
수리무24.03.23

서인과 남인은 예송문제로 왜 싸웠나요?

조선 효종때 조대비의 상복을 1년으로 할 것인지 3년으로 할 것인지에 대해 두 정당이 목숨걸고 싸웠다는데 그게 무엇이 중요하길래 싸우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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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변의 개수4개의 답변이 있어요!
  • 안녕하세요. 서호진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장렬황후는 효종의 의붓어머니 였습니다

    즉, 황후를 어느정도로 대우해 줘야 하는 지는

    그 아들인 효종의 정통성에 직결되는 매우 중요한 문제였고

    효종을 너머 광해군 폐위되던 시점 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하는 오래된 문제였습니다

    선조의 아들들이 살아있는 상황에서 인조가 즉위한게 정통성을 문제삼는 측의 근거였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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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축복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그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조선의 문제는

    각 당의 명분. 및 입장의 차이로 싸웠고 이는

    점자 밥그릇(관직)싸웅과 연계되어 있습니다.

    조선의 당파싸움은 앞으로도 더욱 심해져서

    결국은 한 가문에서 권력을 독점하게 되는데

    조선이 쇠락하는 원인이 되었습니다. 제 답변이 도움이 되셨으면 좋아요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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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예송 노쟁은 2차례가 있었는데 1659년에 기해예송이, 1674년에 갑인예송이 있었다고 합니다. 17세기에 율곡학파로 대표되는 서인과 퇴계학파로 대표되는 남인이 예치가 행해지는 이상사회 건설을 위한 실현방법을 둘러싸고 전개한 성리학 이념논쟁으로, 조선 후기 정치형태였던 붕당정치를 대표하는 정치적인 사건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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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유영화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예송 논쟁의 근본 원인은 조선 후기의 왕위 계승 문제와 관련된 성리학적 이념 논쟁입니다. 이 논쟁은 효종과 효종비에 대한 조대비(인조의 계비)의 복상 기간을 둘러싼 서인과 남인 간의 대립에서 출발하였습니다. 표면적으로는 전례 문제였지만, 실제로는 왕위 계승의 정통성과 성리학의 핵심 문제, 즉 종법(宗法)의 이해 대힙입니다.

    기해예송(1659년)과 갑인예송(1674년)으로 나뉘는 이 논쟁은 서인과 남인 사이의 성리학 이념 논쟁으로 예송 논쟁은 종법에 따른 왕위 계승 방법과 관련하여, 효종이 장자인지 차자인지에 따라 상복을 입는 기간이 달라지는 문제로, 이는 왕위 계승의 정통성 문제와 직결됩니다.

    결국, 이 논쟁은 단순한 상복 문제를 넘어서서, 서인은 국왕을 사대부의 한 사람으로, 남인은 국왕 그 자체로 성리학적 관점 차이이며, 권력 대립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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