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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달한파리매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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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국제시장의 유례 및 역사에 대해서 궁금합키다

안녕하세요 국제시장에 들렀다가 예전 국제 시장 영화도 있었던거 같은데 불연듯 국제시장에 역사 및 어떻게 국제 시장이 시작 되었는지 궁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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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녕하세요. 임지애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부산국제시장의 역사는 다음과 같습니다.

    일제강점기 당시 이 곳은 일본인 구역이었으며 조선인 구역은 지금의 동구 일대였다. 일본인 구역이라서 조선인은 출입금지까지는 아니었지만 일제강점기의 한반도 대도시들은 이렇게 주 활동구역이 민족별로 나눠진 경우가 많았다. 가령 서울의 경우 중구 명동, 충무로(혼마찌도오리) 일대가 일본인 구역이었고 야인시대 등에서 그 분위기가 묘사된다. 그러다가 8.15 광복과 함께 수만 명의 일본인이 한꺼번에 빠져나가면서 생겨버린 도시 중심부의 빈 공간에 자연스레 시장이 형성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도떼기시장이라는 이름이었다.
    6.25 전쟁이 터지고 부산이 임시수도로 지정되면서 전쟁에서 안전한 유일한 곳이 되자 전국에서 엄청난 피난민과 미군 구호물자, 밀수품이 부산항으로 유입되었고 물자가 절대적으로 부족한 시절에 국제시장은 구호품을 빼돌려 팔면서 그야말로 뭐든지 구할 수 있는 곳이 되었다. 외제품을 주로 취급하던 흔적은 지금도 이웃인 깡통시장 등에 남아있다.

    이런 외제물건 수입하는 점포들은 국제시장 외에도 서울(남대문)[4], 여수시, 마산 등 미군부대가 주둔한 곳이라면 어디든 상권을 형성했다. 이들 상권들은 미군 원조가 줄어든 후에는 일본으로부터의 밀수입한 생필품 등도 취급하며 70년대 말까지 그 명맥을 유지했다. 개중 서울 남대문이나 부산 국제시장은 상권이 살아남아 변화한 케이스에 해당.

    이 때 한국전쟁통에 얼마나 해먹었냐면 미군 하역 물자의 10% 내외가 빼돌려져 망실처리될 정도였다.[5] 한국전쟁 휴전 후에는 미군의 물류체계 시스템이 바뀌어버렸는데 그게 바로 CAU, 즉 컨테이너 시스템이다(...). 원래 2차대전 영화에서 보던 것처럼 크레인으로 물자를 일일이 내리던 것을 거대한 철제깡통 상자에 넣고 봉해서 실어버린 것. 현대 해운의 효시는 바로 한국전쟁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미군의 CAU화는 세계 여러 항구의 암시장 경제에 막대한 타격을 주었다(...). 그리고 이제는 밀수되는 품목은 아니지만 아직도 미군 전투식량(C-Ration)들이 깡통시장 구역에 공급되어 판매되는 중이다(...).

    전성기 국제시장의 경우 그야말로 '없는게 없는' 것으로 이름이 높았다. 이웃의 부평깡통시장은 그냥 국제시장과 하나로 묶어서 취급해도 될 정도로 붙어있는데다가, 옆동네인 남포동은 국내 최대 수산시장인 자갈치시장이 자리잡은 부산최대번화가였고, 여기에 보수동 책방골목도 길 건너에 인접해있는 정신나간 상권을 자랑했다. 현재는 전성기에 비하면 굉장히 많이 죽은 상태지만 어디까지나 '전성기에 비하면'일 뿐이다.


    전쟁이 끝난 뒤에도 귀국한 재일교포와 돌아갈 곳 없는 이북 출신 피난민들은 연고가 따로 없어 근처에 정착해 국제시장 상권에서 활동한 경우가 많았다.

    1953년 1월 30일에 일어난 국제시장 대화재로 큰 피해를 입었다.

    이후 일본 제품이나 한소수교 이후에는 러시아 보드카 등 항구를 통해 들어오는 물건들을 다양하게 취급하는 곳이 되었다. 그리고 부산이 관광지가 되며 조금씩 알려지다가 동명의 영화가 히트를 친 이래 전국에 알려져 방문객 수가 늘었다고 한다.

    출처: 나무위키 국제시장

  •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국제시장은 1945년 광복이 되면서 일본인들이 철수하자 자연스럽게 시장이 형성되었으며 1950년 한국전쟁 이후 미군 군용 물자와 부산항을 통해 밀수입된 물자들이 유통되어 시장의 규모가 확장되었습니다.

  • 안녕하세요. 이주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1945년 해방 후 본국으로 철수하는 일본인들이 가재도구나 생활용품 등을 팔아 돈을 챙기기 위해 형성된 도떼기시장에서 유래됐다. 도떼기시장이란 말은 당시 시장의 규모가 큰 것은 물론 없는 물건이 없을 뿐만 아니라 이것저것 가리지 않고 있는 물건을 다 흥정하는 도거리 시장, 혹은 도거리로 떼어 흥정한다는 뜻에서 그렇게 불렀다고 전해진다.

    1948년 판자 건물 12채를 지어 상인들이 입주하게 되면서 자유 시장으로 불렸고, 1950년 한국 전쟁 이후 피난민들이 모여들어 장사하면서 급성장했다. 특히 미군의 군용 물자와 부산항으로 밀수된 온갖 상품들이 이곳으로 몰려들어 전국으로 공급되는 등 국제적인 상품이 거래된다고 하여 1950년 5월 국제시장으로 개칭됐다.

  • 안녕하세요. 이홍휴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일제강점기 당시 이 곳은 일본인 구역이었으며 조선인 구역은 지금의 동구 일대였다. 일본인 구역이라서 조선인은 출입금지까지는 아니었지만 일제강점기의 한반도 대도시들은 이렇게 주 활동구역이 민족별로 나눠진 경우가 많았다. 가령 서울의 경우 중구 명동, 충무로(혼마찌도오리) 일대가 일본인 구역이었고 야인시대 등에서 그 분위기가 묘사된다. 그러다가 8.15 광복과 함께 수만 명의 일본인이 한꺼번에 빠져나가면서 생겨버린 도시 중심부의 빈 공간에 자연스레 시장이 형성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도떼기시장이라는 이름이었다.[2][3]

    6.25 전쟁이 터지고 부산이 임시수도로 지정되면서 전쟁에서 안전한 유일한 곳이 되자 전국에서 엄청난 피난민과 미군 구호물자, 밀수품이 부산항으로 유입되었고 물자가 절대적으로 부족한 시절에 국제시장은 구호품을 빼돌려 팔면서 그야말로 뭐든지 구할 수 있는 곳이 되었다. 외제품을 주로 취급하던 흔적은 지금도 이웃인 깡통시장 등에 남아있다 라고합니다.

  • 안녕하세요. 김선도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안녕하세요! 부산 국제시장은 한국 부산에 위치한 대표적인 재래시장으로, 한국 전통 시장 문화를 대표하는 곳 중 하나입니다. 국제시장은 다양한 상점과 가게가 모여 있는 시장으로, 식료품, 의류, 생활용품, 전통 공예품 등 다양한 상품을 구매할 수 있습니다.

    부산 국제시장의 역사는 조선시대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조선시대에는 부산이 중요한 교역 항구로 발전하면서 시장이 형성되었으며, 이후 다양한 변천을 겪으며 지금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습니다.

    국제시장은 1950년대 한국전쟁 이후 해외로 수출되는 상품들이 모여 판매되는 곳으로 발전하였습니다. 당시에는 해외에서 수입한 다양한 상품들이 국제시장에서 판매되었고, 이로 인해 국제적인 분위기를 갖춘 시장으로 알려졌습니다.

    또한, 국제시장은 2010년에 개봉한 영화 "국제시장"의 촬영지로 유명해졌습니다. 이 영화는 한국의 경제 발전과 역사를 배경으로 하며, 국제시장에서 일어나는 이야기를 다루고 있습니다. 이 영화를 통해 국제시장은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진 장소가 되었으며, 많은 관광객들이 찾는 명소 중 하나가 되었습니다.

    부산 국제시장은 부산의 상징적인 장소로서, 한국의 전통적인 시장 문화와 국제적인 분위기를 함께 경험할 수 있는 곳입니다.

  • 안녕하세요. 정준영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광복과 더불어 귀환동포들이 생활근거지로 모여들어 터를 잡고 노점을 차림으로써 시장으로 형성되었습니다.


    본래 ‘도떼기시장’에서 출발하여 1948년에는 공식명칭을 ‘자유시장’으로 정하고 단층목조건물 12동을 건립하였습니다. 6·25전쟁 중에는 부산으로 몰려든 피난민들로 그야말로 성시를 이루었습니다.


    그때부터 국제시장은 나름대로의 특성을 지닌 채 인근 광복동·남포동의 도심상가와 더불어 유통기능의 중추적 기능을 담당하였습니다.


    귀환재일동포와 이북피난민들이 연고가 없는 부산에서 정착하는 과정에서 시장상인으로 등장하였고, 끝내 상권을 장악할 만큼 성장한 경우도 적지 않습니다. 동란의 혼란 속에서도 국제시장은 활황을 누렸습니다.


    원조물자·구호품·군용품이 절대부족상태의 민간소비용품과 함께 유통되었고 속칭 ‘양키시장’ 같은 곳에서는 외제품이 판을 쳤습니다.


    서울에서 피난살이로 부산에 내려간 문인·식자들 중에서도 국제시장의 어느 구석에서 호구지책을 마련한 이들이 적지 않습니다. 따라서 당시의 국제시장은 상거래장소에 그치지 않고 사회와 문화의 용광로이며 정보와 변화의 원천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1950년 12월과 1953년 1월의 연이은 두 차례의 대화재는 그것이 가져온 물질적 손실도 컸지만 전시의 엄동설한에 영세상인과 주민에게 준 충격 또한 매우 컸었습니다. 화재가 난 뒤 2층 건물 12개 동이 재건되고 상가의 면모가 일신되었으나, 국제시장은 이미 이전의 활기가 가라앉은 상태였습니다.


    휴전과 더불어 피난민들이 돌아가고 새로운 경제질서가 자리잡히기 시작하자, 국제시장은 그 동안의 갖가지 애환을 간직한 채 부산권의 일반 도·소매시장으로 탈바꿈하였습니다.


    1966년 5월 정부가 시장대지를 상인들에게 불하하기로 약속하였고, 매매계약이 체결되었습니다. 이어 1968년 1월에는 목조건물 3동을 제외한 9개 동이 철근콘크리트로 개조되었고, 상가대지 2,177평이 불하되어 1,489칸의 점포가 개인별로 등기되었습니다.


    1969년 1월 사단법인 국제시장번영회가 설립되어 상공부장관의 인가를 받았고, 1977년에 정식으로 시장개설허가가 나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