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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울곤잘
라울곤잘23.11.07

조선시대 기사환국은 어떠한 사건을 말하는 것 인가요?

조선시대에 기사환국이라는 사건이 일어났다고 알고 있는데요.

기사환국은 어떠한 사건을 말하는 것인지 궁금합니다.

어떠한 이유때문에 일어난 것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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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변의 개수3개의 답변이 있어요!
  • 탈퇴한 사용자
    탈퇴한 사용자23.11.07

    안녕하세요. 임지애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숙종은 1680년 10월에 숙종의 첫 왕비인 인경왕후가 서거하자, 민유중의 딸을 계비로 맞았습니다. 그런데 인현왕후가 원자를 낳지 못하는 가운데 1688년에 숙종이 총애하던 소의 장씨가 아들을 낳자 숙종은 이듬해 그 아들을 원자로 삼아 정호할 것을 명하였으나 서인은 이를 반대하였습니다.숙종은 나라의 형세가 외롭고 위태로우며, 주위에 강한 이웃나라가 있어 종사의 대계를 늦출 수 없다고 하여 반대론을 물리치고, 5일 만에 왕자의 정호를 종묘사직에 고하고 그의 생모인 장씨를 희빈으로 높였습니다.이에 대하여 노론측의 반대론을 다시 제기하였으나 이는 노론이 축출당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고 희빈 장씨를 왕비로 책봉하였습니다. 후궁 장씨가 1686년에 처음 숙종의 총애를 받기 시작하여 후궁 장씨의 이러한 주위 인물들이 마침내 그녀의 생남을 계기로 남인과 본격적으로 접촉을 가지게 된 것입니다. 이 일로 1683년 경신환국 이래 집권해 온 서인이 대거 축출되고 남인이 크게 진출하였습니다.


  • 안녕하세요. 장세영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기사환국은 조선 숙종 15년인 1689년에 있었던 사건으로, 원자 정호(호칭을 결정함) 및 인현왕후 폐비 문제로 서인이 실각하고 남인이 재집권하였습니다.


    숙종은 첫 왕비인 인경왕후 김씨에게서 딸만 얻었고, 다시 들인 왕비 인현왕후 민씨와는 자식이 없었습니다. 이러한 가운데 후궁 소의 장씨가 왕자를 낳았습니다.


    숙종은 후계를 안정시키기 위해 소의 장씨의 소생을 원자에 책봉하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장씨는 그 집안이 남인과 관계를 가지고 있었기에 서인은 이를 저지하려 했습니다.


    서인은 숙종의 결정이 너무 이르다며 아직 시간이 있으니 왕비와의 사이에서 자식을 볼 때까지 기다릴 것을 건의하였습니다. 그러나 숙종은 후계를 확정 짓고 왕권의 기반을 튼튼히 하길 원했습니다. 그리하여 장씨의 왕자 이윤이 원자로 정해졌고, 장씨는 희빈으로 승격되었습니다.


    그런데 서인의 대표격 인물인 송시열이 이 문제를 다시 들먹이며 반대 의사를 내비쳤습니다. 이에 숙종은 크게 화를 내며 송시열을 비롯한 서인의 중진들을 사사하였습니다. 또 남인들을 많이 임명하였고, 지난 경신환국으로 죽은 남인들이 복권되기도 했습니다.


    더 나아가 숙종은 환국이 단행된 지 4개월 만에 인현왕후 민씨를 성종 비 폐비 윤씨의 사례를 들어 폐서인하였습니다. 폐비에 반대한 서인들은 숙종의 명으로 국문을 받고 모두 귀양길에 올랐습니다. 그리고 희빈 장씨는 왕비로 승격되었습니다.


    따라서 기사환국은 서인이 우세하게 집권하는 상황에서 자신의 입지를 강화하기 위해 숙종이 계획한 사건입니다. 그러므로 남인의 집권은 오로지 국왕의 의도에 따른 결과물이었기에 그 기반이 허약하여 훗날 집권 5년 만에 정국의 주도권을 상실한 것입니다.


  • 안녕하세요. 유영화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1860년 경신환국으로 서인에 의해 몰락한 남인이 1689년(숙종 15) 숙종이 장희빈(張禧嬪)의 아들을 적장자(嫡長子)로 인정하여 원자(元子)로 삼으려 하자 이에 대해 문제를 제기했던 서인을 대거 몰아내고 인현왕후(仁顯王后)를 폐위시키면서 남인이 정권을 잡은 사건을 기사환국(己巳換局)이라 합니다. 이로써 송시열이 사형되고 장희빈이 왕비로 승격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