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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퇴한 사용자
탈퇴한 사용자23.05.20

기사환국은 어떤 사건이었나요???

안녕하세요.

한국사에서 기사환국은 어떤 사건이었나요?

기사환국이 일어난 시기와 발생하게 된 배경은 어떻게 되는지 궁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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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이승원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숙종은 1680년 10월에 숙종의 첫 왕비인 인경왕후(仁敬王后)가 서거하자, 민유중(閔維重)의 딸을 계비(繼妃: 仁顯王后)로 맞았다. 그런데 인현왕후가 원자를 낳지 못하는 가운데 1688년에 숙종이 총애하던 소의 장씨(張氏)가 아들을 낳자, 숙종은 이듬해 그 아들을 원자로 삼아 정호할 것을 명하였으나, 서인은 이를 반대하였다.

    즉, 영의정 김수흥(金壽興)을 비롯한 이조판서 남용익(南龍翼), 호조판서 유상운(柳尙運), 병조판서 윤지완(尹趾完), 공조판서 심재(沈榟), 대사간 최규서(崔奎瑞) 등 노론계는 한결같이 중전의 나이가 아직 한창인데, 두 달 만에 후궁 소생을 원자로 정함은 부당하다고 반대하였다.

    숙종은 나라의 형세가 외롭고 위태로우며, 주위에 강한 이웃나라가 있어 종사(宗社)의 대계를 늦출 수 없다고 하여 반대론을 물리치고, 5일 만에 왕자의 정호를 종묘사직에 고하고 그의 생모인 장씨를 희빈으로 높였다.

    이에 대하여 노론측의 영수 송시열(宋時烈)이 봉조하(奉朝賀)로서 옛날 송나라 신종(神宗)이 28세에 철종(哲宗)을 얻었으나 후궁의 소생이어서 번왕(藩王)으로 책봉하였다가 적자가 없이 죽게 되자 태자로 책봉하여 그 뒤를 잇게 한 고사를 들어 반대론을 다시 제기하였다.

    그러나 이는 노론이 축출당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즉, 숙종은 승지 이현기(李玄紀)·윤빈(尹彬), 교리 남치훈(南致熏)·이익수(李益壽) 등과 의논하여 송시열의 관작을 삭탈하여 외지로 출송(黜送)시키고, 이어서 영의정 김수흥을 파직시켰으며, 목내선(睦來善)·김덕원(金德遠)·민종도(閔宗道)·민암(閔黯)·목창명(睦昌明) 등 남인계 인사들을 대거 등용하였다.

    반면에 노론계는 송시열이 제주도로 유배되어 사사된 것을 비롯하여, 이이명(李頤命)·김만중(金萬重)·김수흥·김수항(金壽恒) 등이 복주(伏誅) 또는 유배당하였다. 그 해 4월에 이르러 숙종이 중전 민씨를 폐비할 뜻을 비추자, 이에 노론측은 오두인(吳斗寅) 등 86인의 이름으로 이를 저지하고자 하는 상소를 올렸지만, 그 주동자인 박태보(朴泰輔)·이세화(李世華)·오두인 등이 국문당하여 위리안치되거나 귀양갔으며, 5월 2일에 인현왕후를 폐비하고 희빈 장씨를 왕비로 책봉하였다.

    후궁 장씨가 1686년에 처음 숙종의 총애를 받기 시작하여 숙원(淑媛)으로 봉해진 이듬해 조사석(趙師錫)이 우의정으로 올랐는데, 이는 장씨로 인한 정국변동과 무관하지 않았다. 조사석은 장씨의 외가와 친밀한 사이였기 때문에 이 무렵 동평군 항(東平君杭)은 종친으로서는 이례적으로 선혜청제조로서 궁중을 무상 출입하였는데, 숙원의 오빠 장희재(張希載)가 그와 연결을 맺고 있었다.

    후궁 장씨의 이러한 주위 인물들이 마침내 그녀의 생남을 계기로 남인과 본격적으로 접촉을 가지게 된 것이다. 원자 정호 때는 민암·민종도·이의징(李義徵) 등의 남인이 동평군·장희재 등과 직접 연락을 가진 것으로 알려졌다.

    원래 장씨의 집안은 작은아버지가 역관으로 중인 출신이었는데, 이러한 신분으로 왕비에까지 책봉된 것은 전례가 없는 것으로, 17세기 후반 이후 사회·경제상의 변동으로 상인·역관 등의 사회적 지위가 향상된 데 따른 현상으로 보인다. 이 일로 1683년 경신환국 이래 집권해 온 서인이 대거 축출되고 남인이 크게 진출하였다.

    [네이버 지식백과] 기사환국 [己巳換局]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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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잘난몽구스218
    잘난몽구스21823.05.20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경신대출적으로 실각했던 남인이 1689년 원자를 정하는 문제를 계기로 서인을 몰아내고 집권한 사건입니다.

    숙종은 오래도록 왕자를 가지지 못하다 소의 장씨가 아들을 낳자 서둘러 이를 원자로 임명하고 장씨를 희빈에 책봉하고자 했고 이에 대해 서인은 왕비 민씨가 아직 젊으니 후일을 기다리는 것이 좋다며 반대, 숙종은 이러한 반대를 뿌리치고 장씨를 희빈에, 장씨 소생의 왕자를 원자로 임명합니다.

    그러나 서인의 영수 송시열은 상소를 통해 중국의 예를 들어 다시 반대, 숙종은 이에 대해 못마땅하게 생각하던 중 남인이 숙종의 결정을 지지하며 송시열을 공격하는 상소를 올리자 송시열을 파직하고 유배시켰다가 처형했으며 그를 지지하던 서인들도 관직을 박탈, 귀양보내지게 됩니다. 이로써 서인 정권은 무너지고 남인이 다시 정권을 잡게 되었으며 숙종이 민비를 폐비하고 장희빈을 왕비에 책봉하려 하자 서인은 다시 이에 반대하는 상소를 올리나 숙종은 상소의 주동자를 유배, 민비를 폐비, 장희빈을 왕비로 맞이하며 남인의 정권이 더 굳어지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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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이주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장희빈의 아들 원자 균의 세자책봉문제로

    중전 민씨가 폐위됨으로써 희빈 장씨가 중전이 되고 원자 균은 세자에 책봉된다. 이렇게 노론계가 정치 일선에서 제거되자 서인은 힘을 상실하게 되었고, 조정에 남인이 대거 등용되어 정국의 주도 권은 민암, 이의징 등의 남인에게 돌아가게 된다. 이 서인 대출척사건을 '기사환국'이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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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이병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기사환국(己巳換局)은 1689년(숙종 15년) 후궁 소의(昭儀) 장씨(張氏) 소생을

    원자로 정호(正號)하는 문제를 계기로 서인이 축출되고 남인이 장악한 사건입니다.

    숙종의 첫 왕비인 인경왕후가 서거하자, 민유중의 딸을 계비(인현왕후)로 맞았습니다.

    인현왕후가 원자를 낳지 못하는 가운데 숙종이 총애하던 소의 장씨가 아들을 낳자,

    숙종은 이듬해 이 아들을 원자로 삼아 정호할 것을 명하였으나 서인이 이를 반대하면서

    축출되고 남인이 장악하게 된 사건을 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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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정준영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숙종은 1680년 10월에 숙종의 첫 왕비인 인경왕후(仁敬王后)가 서거하자, 민유중(閔維重)의 딸을 계비로 맞았습니다. 그런데 인현왕후가 원자를 낳지 못하는 가운데 1688년에 숙종이 총애하던 소의 장씨(張氏)가 아들을 낳자, 숙종은 이듬해 그 아들을 원자로 삼아 정호할 것을 명하였으나, 서인은 이를 반대하였습니다.


    즉, 영의정 김수흥(金壽興)을 비롯한 이조판서 남용익(南龍翼), 호조판서 유상운(柳尙運), 병조판서 윤지완(尹趾完), 공조판서 심재(沈榟), 대사간 최규서(崔奎瑞) 등 노론계는 한결같이 중전의 나이가 아직 한창인데, 두 달 만에 후궁 소생을 원자로 정함은 부당하다고 반대하였습니다.


    숙종은 나라의 형세가 외롭고 위태로우며, 주위에 강한 이웃나라가 있어 종사(宗社)의 대계를 늦출 수 없다고 하여 반대론을 물리치고, 5일 만에 왕자의 정호를 종묘사직에 고하고 그의 생모인 장씨를 희빈으로 높였습니다.


    이에 대하여 노론측의 영수 송시열(宋時烈)이 봉조하(奉朝賀)로서 옛날 송나라 신종(神宗)이 28세에 철종(哲宗)을 얻었으나 후궁의 소생이어서 번왕(藩王)으로 책봉하였다가 적자가 없이 죽게 되자 태자로 책봉하여 그 뒤를 잇게 한 고사를 들어 반대론을 다시 제기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는 노론이 축출당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습니다. 즉, 숙종은 승지 이현기(李玄紀) · 윤빈(尹彬), 교리 남치훈(南致熏) · 이익수(李益壽) 등과 의논하여 송시열의 관작을 삭탈하여 외지로 출송(黜送)시키고, 이어서 영의정 김수흥을 파직시켰으며, 목내선(睦來善) · 김덕원(金德遠) · 민종도(閔宗道) · 민암(閔黯) · 목창명(睦昌明) 등 남인계 인사들을 대거 등용하였습니다.


    반면에 노론계는 송시열이 제주도로 유배되어 사사된 것을 비롯하여, 이이명(李頤命) · 김만중(金萬重) · 김수흥 · 김수항(金壽恒) 등이 복주(伏誅) 또는 유배당하였습니다. 그 해 4월에 이르러 숙종이 중전 민씨를 폐비할 뜻을 비추자, 이에 노론측은 오두인(吳斗寅) 등 86인의 이름으로 이를 저지하고자 하는 상소를 올렸지만, 그 주동자인 박태보(朴泰輔) · 이세화(李世華) · 오두인 등이 국문당하여 위리안치되거나 귀양갔으며, 5월 2일에 인현왕후를 폐비하고 희빈 장씨를 왕비로 책봉하였습니다.


    후궁 장씨가 1686년에 처음 숙종의 총애를 받기 시작하여 숙원(淑媛)으로 봉해진 이듬해 조사석(趙師錫)이 우의정으로 올랐는데, 이는 장씨로 인한 정국변동과 무관하지 않았습니다. 조사석은 장씨의 외가와 친밀한 사이였기 때문에 이 무렵 동평군 항(東平君杭)은 종친으로서는 이례적으로 선혜청제조로서 궁중을 무상 출입하였는데, 숙원의 오빠 장희재(張希載)가 그와 연결을 맺고 있었습니다.


    후궁 장씨의 이러한 주위 인물들이 마침내 그녀의 생남을 계기로 남인과 본격적으로 접촉을 가지게 된 것입니다. 원자 정호 때는 민암 · 민종도 · 이의징(李義徵) 등의 남인이 동평군 · 장희재 등과 직접 연락을 가진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원래 장씨의 집안은 작은아버지가 역관으로 중인 출신이었는데, 이러한 신분으로 왕비에까지 책봉된 것은 전례가 없는 것으로, 17세기 후반 이후 사회 · 경제상의 변동으로 상인 · 역관 등의 사회적 지위가 향상된 데 따른 현상으로 보입니다. 이 일로 1683년 경신환국 이래 집권해 온 서인이 대거 축출되고 남인이 크게 진출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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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김종호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숙종 15년(1689년) 송시열을 중심으로 한 서인이 정치적으로 대거 실각한 사건이다. 숙종대에서 두 번째로 일어난 환국이다. 이 기사환국은 보복성 숙청도 짙었던 환국이었다.


    발단은 장희빈의 아들(훗날의 경종)의 원호를 정하는 것에서 비롯되었다. 원호를 정한다는 것은 곧 이 아들을 숙종의 공식 후계자인 왕세자로 지정하겠다는 것과 같았다. 원자란 정궁에서난 임금의 맏아들로 중전이 적장자를 생산하면 자연스럽게 원자라 불렸다. 즉, 서출 원자정호라는 것은 전례가 없는 일이였다.

    -출처 나무위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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