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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람한스컹크1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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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자호란때 잡혀갔던 사람들은 어떻게 되었나요?

병자호란때 후금에게 끌려간 수많은 사람들은 어떻게 되었나요? 대부분 되돌아왔나요? 돌아온 사람들에 사회적으로 어떤 대우를 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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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개의 답변이 있어요!
    • 탈퇴한 사용자
      탈퇴한 사용자

      안녕하세요. 임지애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병자호란은 짧은 전쟁 기간에도 불구하고 전쟁 포로로 수십 만의 백성이 청나라으로 끌려가 그 사회적 피해가 유례없이 막심하였다고 합니다. 잡혀간 사람들의 행적에 대해서는 아래의 기록을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1637년 음력 2월 1일의 조선왕조실록 기록에는 여염(백성들이 모여 사는 곳)이 대부분 불타고 넘어져 죽은 시체가 길거리에 이리저리 널려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1637년 2월 2일 청 태조는 먼저 청을 향해 출발하였고 2월 8일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이 예친왕 도르곤을 따라 심양으로 떠났다고 합니다. 조선 백성은 후금(후에 청으로)군에게 포로가 된 백성을 제외하고도 심양에 있는 노예시장에서 60만 이상이 거래되었다고 합니다.

      이리하여 소현세자와 봉림대군 두 왕자 부부가 인질로 가고 척화파 강경론자인 이른바 삼학사인 홍익한, 윤집, 오달제는 잡혀가 참형되고 김상헌도 뒤에 잡혀가서 오랫동안 옥중에서 생활하였습니다. 이 사람들을 비롯하여 수많은 여인과 여러 관리와 대신의 많은 자녀가 청의 사신 잉굴다이에게 붙잡혀갔는데 그 수는 197명입니다.

      한양은 종로와 광통교 일대에 있던 집은 모두 파괴되었고 많은 마을이 약탈과 방화로 아수라장이 되어 임진왜란 후 회복하려는 노력 또한 수포로 돌아갔습니다.

      그 후 이 원한을 씻고자 사사로이 북벌을 계획하는 자도 있었습니다. 임경업이 명과 연락하여 청을 치려 하였지만 결국 실패하였다고 합니다.

    • 안녕하세요. 김기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병자호란 때 잡혀간 사람 중에는 죽거나 노비의 살을 살아야 했습니다. 그중에는 고향으로 되돌아 온 여자들도 있었으나 그들 복중에는 오랑캐의 씨를 베고 돌아온 경우도 있었습니다. 아무래도 임신을 한 여자들이 거칠었기 때문에 그 여자들을 처음에는 고향으로 돌아온 여자라 하여 환향녀라고 불렀으나 나중에는 화냥년이라고 불리웠으며 그들의 자식을 호로자식(애비없는 자식 또는 오링캐의 자식)이라고 부르며 조롱하였습니다. 역사적인 아픔이 느껴지는 지점입니다.

    •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1636년 병자호란에서 인조가 청 태종에게 항복한 이후 60만 명에 달하는 조선인이 포로로 잡혀갔다. 최명길은 “청군이 항복을 받고 정축년 2월 15일 한강을 건널 때 포로로 잡힌 인구가 50여만이었다”고 썼다고 합니다. 당시 조선 인구는 1000만 명 정도였다. 전체 인구의 6%가 전쟁포로로 끌려간 셈입니다. 포로들은 노예시장으로 팔려나갔습니다. 청나라 사람들은 남자든 여자든 조선인 포로의 옷을 모두 벗기고 건강 상태를 본 뒤 값을 치르고 노예를 사갔다고 합니다. 약소국의 첨혹한 시대 상황 을 보여 주는 부분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