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국공주가 공민왕의 개혁을 지지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노국공주는 원나라의 공주이지만 공민왕과 결혼했습니다. 언뜻 생각하기에는 굉장히 사이가 안좋았을 것 같은데 사이가 좋았으며 공민왕의 개혁을 지지했다고 하던데 그 이유는 무엇인가요?
안녕하세요. 정준영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노국대장공주는 성품이 조용하고 단아하였으며, 15년 동안 고려왕비로 있으면서 공민왕의 후비로서의 책무를 다하였습니다. 1353년(공민왕 2) 8월에 원에서 기황후의 어머니인 영안왕대부인(榮安王大夫人)을 위해 보르차[孛兒札]연을 베풀 때 공주는 원에서 온 만만태자(巒巒太子)와 함께 남쪽을 향해 앉고, 왕은 서쪽에, 이씨는 동쪽에 앉았습니다. 이는 당시 노국대장공주의 위상을 반영한 것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주는 국내기반이 미약한 공민왕의 정치운영을 지지하고 때로는 목숨까지 지켜준 존재였습니다.
1352년(공민왕 1) 9월 연저(燕邸) 수종공신(隨從功臣) 조일신(趙日新)이 난을 일으켰습니다. 이 때 공민왕을 시해한 자들이 모두 조일신 세력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공민왕은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습니다. 이것은 부원세력인 조일신에 맞서 노국대장공주가 공민왕을 지켰기 때문이었습니다. 노국대장공주의 이러한 정황은 흥왕사의 난 때 구체적으로 드러납니다. 1363년(공민왕 12) 연저 수종공신인 김용 등은 행궁인 흥왕사로 침입하여 원 황제의 명령을 받고 들어왔다고 하여 침전에 들어가 공민왕을 시해하고자 하였습니다. 이때 노국대장공주는 공민왕을 온 몸으로 맞서 지켜냈습니다. 이색(李穡)은 이 상황에 대해 ‘노국공주가 문 앞에서 공민왕을 지키려고 앉아 있었다. 적들이 그 앞에서 칼을 빼들고 덤벼드는 위태로운 상황에서도 감히 공주에게는 독기를 부리지 못했으므로 장상(將相)이 그 틈을 이용하여 김용 일파를 제거할 수 있었다.’고 하였습니다.
한편 노국대장공주는 후사를 얻기 위하여 노력하였습니다. 1353년(공민왕 2) 4월과 9월에는 복령사(福靈寺)에 행차하여 후사를 빌었으며, 7월에는 왕과 공주가 함께 내정(內庭)에서 견우성과 직녀성에 제사를 지냈습니다. 또 같은 해에 태조의 증조비인 정화왕후(貞和王后)가 출생한 곳인 흥성사(興聖寺)에 가서 공주가 직접 공덕주가 되어 불사에 힘쓰는 한편 후사를 기원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노국대장공주가 임신을 하지 못하자 대신들은 왕을 위한 후궁을 둘 것을 공주에게 건의하였습니다. 공주는 이를 허락하였고, 이 때 후궁으로 들어온 이가 이제현의 딸 혜비(惠妃)입니다. 그러나 공주는 곧 후회하여 음식을 먹지 않고 투기하기도 하였습니다. 이러한 노력 끝에 공주는 임신을 하게 되고 1365년(공민왕 14) 2월에 출산에 들어갔습니다. 공민왕은 공주의 출산일이 다가오자 2죄(참형과 교형) 이하를 사면하였습니다. 그러나 난산으로 공주의 병이 심해지자 사찰과 신사에 빌게 하였고 1죄(참형)까지 사면하였으며, 왕은 스스로 분향하고 잠시도 공주 옆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그렇지만 공주는 난산 끝에 아이와 함께 사망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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