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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y천사1004
Jy천사100423.04.27

공민왕은 성공한 개혁군주인가요?

안녕하세요? 고려 후기때 공민왕은 여러가지 개혁정책을 함으로써 고려의 발전을 이끌어 낼려고 한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마지막에는 잘 안된걸로 알고 있는데 어떠한 경위가 있었는지 궁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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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변의 개수2개의 답변이 있어요!
  • 탈퇴한 사용자
    탈퇴한 사용자23.04.27

    안녕하세요. 이승원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개혁군주였으나 재위 후반기에는 초심을 잃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고려시대 왕 중에서 태조 왕건 다음으로 잘 알려진 왕이 제31대 왕 공민왕(1330~1374, 재위 1351~1374)일 것이다. 그의 이미지는 한마디로 정의하면, 개혁군주이다. 고려 말에 원나라 지배에서 벗어나고자 과감한 개혁정치를 단행한 인물이기 때문이다. 그 외에도 부인인 노국공주와의 애틋한 사랑, 요승으로 알려진 신돈의 등용 등 여러 가지 드라마틱한 요소가 많은 왕이기도 하다.

    재위 초반과는 다른 공민왕 집권 후반기의 모습들

    재위 초반 고려의 자주독립과 여러 개혁정치에 노력을 기운 공민왕이었지만, 정치가로서의 운명은 불우했다. 복잡한 국제정세 속에 반란과 잦은 전쟁은 공민왕의 인격을 파탄 냈고, 노국대장공주의 죽음은 그를 폐인으로 만들었다. 절제와 금욕적인 삶을 살았던 왕이었지만, 노국대장공주의 죽음과 정치적 고독감을 이기지 못해 지나치게 성적인 것만 탐닉하는 왕이 되었다. 전대 왕들의 사치를 비판하며 백성의 생활을 걱정하던 그였지만, 말년에는 백성의 고통을 외면하고 대규모의 토목공사를 강행했다.

    공민왕은 신돈이 실각한 뒤로 이상한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다. 자제위(子弟衛)를 두어 나이 어린 미소년들을 뽑고는 동성애와 관음증에 빠져 지내기 일쑤였다. 자제위는 형식상 왕의 경호를 위한 귀족 자제들의 집단이었지만, 실질적으로는 이들 자제위 미소년들과 기괴한 유희를 즐겼다. 너무 열중한 나머지 휴가도 주지 않았다.

    공민왕은 태후가 우를 세자로 허락해 주지 않자, 다시 후사를 걱정하였다. 급기야 홍윤 등 자제위들의 불만을 잠재우면서 동시에 비빈들을 임신시킬 생각을 하게 되었다. 공민왕은 홍윤·한안 등 자제위 출신들과 그의 비빈들을 억지로 간음하게 하여 왕자를 얻으려는 희망을 품었으나 정비·혜비·신비 등 3비가 한사코 거부하는 바람에 뜻을 이루지 못했다. 하는 수 없이 공민왕은 마지막으로 익비를 김흥경과 홍윤·한안 등이 간음하도록 했다. 이때 익비 역시 거부하자 공민왕은 칼로 위협하며 강제로 간음을 시켰고, 이후 익비는 임신을 하였다.

    잔인하게 시해를 당한 고려의 마지막 등불 공민왕

    ㄱ공민왕은 익비를 임신시킨 홍윤과 이 사실을아는 최만생을 없애고자 했다. 1374년(공민왕 23년) 9월 21일 밤, 침전에 들어간 최만생과 홍윤 등은 술에 취해 정신없이 자는 공민왕의 온몸을 칼로 마구 찔러댔다. 이들이 휘두른 칼에 공민왕은 뇌수가 벽에 튀어 붙을 정도로 처참한 죽음을 맞이했다. 이때 공민왕의 나이 45세였다. 그 뒤 최만생·홍윤·한안·권진 등은 왕을 시해한 죄로 능지처참을 당하고 그들의 나머지 친족도 모두 잡혀 유배되거나 노비가 되었다.

    고려의 등불 같은 존재였던 공민왕이었지만, 그의 죽음은 이처럼 처참하고 허무했다. 고려의 역대 제왕은 태조 이후로 원종까지 본국에서 시호와 묘호를 지었으나, 원나라 간섭을 받게 된 충렬왕대부터는 원나라로부터 시호를 받았을 뿐 묘호는 붙이지 못했다. 공민왕대에 명나라가 강성해지자 고려의 대외관계도 크게 바뀌어 공민왕의 시호인 ‘공민(恭愍)’은 명나라에서 받은 것이었다. 본국에서는 공민왕에게 ‘경효(慶孝)’라는 시호를 추증했다. 그 뒤의 우왕과 창왕은 모두 폐시(廢弑)되어 시호가 없고 마지막 임금 공양왕은 새 왕조 조선에서 추증한 것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공민왕 [恭愍王] - 고려 재건을 위해, 개혁을 단행하다 (인물한국사, 정성희, 장선환)


  • 안녕하세요. 박남근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공민왕을 개혁군주라 합니다.

    반원정책 쓰고, 기철 일당을 죽이고 인사권을 빼앗았습니다. 원나라 풍습을 받아드리지 읺았으며 본인 자신도 몽골풍에서 벗어나려했습니다.

    성리학을 부흥시키고 전민병정도감 설치로

    토지제도 개혁 했습니다.


    군사력 증강으로 쌍성 총독부를 되찾으며 고려의 마지막 불꽃을 떠 트립니다 하지만 공민왕의 개혁은 여러 반발을 무릅쓰고 하다 노국공주가 죽으면서 공민왕의 슬픔으로 멈추게 됩니다 라는 답변을 구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