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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울곤잘
라울곤잘23.11.07

조선 무오사화는 무엇이고 왜 일어난 사건 인가요?

역사관련 공부를 하다가 모오사화를 알게 되었는데요.

무오사화는 어떠한 사건을 말하는 것인가요?

그리고 어떠한 이유 때문에 일어난 것인지 궁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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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변의 개수5개의 답변이 있어요!
  • 안녕하세요. 윤지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무오사화(戊午士禍)는 1498년(연산군 4) 김일손 등 신진사류가 유자광 중심의 훈구파에게 화를 입은 사건입니다. 사초가 발단이 되어 일어난 사화로 조선시대 4대사화 가운데 첫 번째 사화입니다


  •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무오사화는 1498년 음력 7월 훈구파가 사림파를 대대적으로 숙청한 사건을 말합니다.

    성종은 세조의 장남인 의경세자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으나 아버지 의경세자가 죽자 숙부 해양대군이 세자에 책봉되면서 왕위 계스원에서 제외됩니다. 따라서 1468년 조부 세조 사후에 숙부인 예종이 즉위, 숙부 예종이 즉위 14개월만에 죽었을 때 예종의 적장자인 제안대군과 성종의 친형인 월산군을 뒤로하고 성종이 왕에 즉위하는데 이는 할머니인 정희왕후와 훈구파 대신들의 추대에 의한 것으로 , 계승서열을 뛰어넘은 즉위과정으로 인해 성종은 즉위 후 정치적인 입지가 매우 좁았고, 왕권도 약했습니다.

    성종의 즉위 후 할머니 정희왕후가 7년동안 섭정했는데 성종은 저자세로 일관하며 때를 기다리다 1476년 친정이 시작되자 태종과 세조에 의해 숙청된 사림파를 대거 등용해 훈구파를 견제 합니다.

    세조가 만든 원상제 역시 폐지, 원상제는 공신 원로들이 실질적으로 정책을 결정하고 왕은 형식적으로 결제만했던 제도로 왕의 실권 행사를 가로 막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계유정란 이후 세조시대의 공신들은 정치적, 경제적인 각종 특권을 누리며 매관매직을 하고 전횡을 일삼으려 국정을 농단, 주로 삼사에 기용된 사림파들이 공신들로 구성된 훈구파의 부정과 부패를 비판하자 양측은 빈번하게 충돌합니다.

    그러나 사림파의 성리학 근본주의적 행태는 성종까지도 말년에 거리를 두게 만들었고, 그의 아들 연산군은 이런 사림파를 매우 불편하게 여깁니다.

    사림파도 연산군의 국정방식이 못마땅했고 그 결과 삼사는 연산군 즉위 이래 거의 하루도 거르지 않고 상소를 올릴 정도로 국왕과 대립하게 됩니다.

    연산군은 즉위 후 성종실록 편찬을 명하는데 이는 조선시대 왕이 사망하고 새로운 왕이 즉위하면 실록청을 구성해 전왕이 생존했을 때 기록한 사초를 토재도 하여 실록을 편찬하는 선례를 따른 것입니다. 이때 성종실록 편찬의 책임자로 실록청 당상관에 임명된 이극돈은 미리 사초를 열람할 기회가 있었는데 사초에 훈구파 대신들이 각종 부정과 비리에 대해 상세히 적혀있는 것을 발견, 그 중 사림파의 김일손이 작성한 사초에는 이극돈 자신이 관련된 비리 역시 있었습니다. 정희왕후의 상중에 장흥의 관기를 가까이 한 일과 뇌물을 받은 일, 세조때 불교중흥 정책을 편 세조의 눈에 들어 불경을 잘 외워 출세했다는 등 대부분 부정적인 내용이었습니다.

    이극돈은 김일손에게 내용 삭제를 부탁하나 사관이 쓴 사초를 함부로 폐기할 수 없다는 이유로 거부, 이극돈은 실록 편찬에 기초가 되는 사초를 실록 편집이 끝나면 파기하여 비밀에 부쳐야 하는 것이 원칙임에도 사초를 유출해 훈구파였던 유자광과 의논합니다.

    유자광은 김일손의 스승인 김종직을 비롯한 사림파들과 악연이 많았는데, 사림파 대간들은 유자광이 서얼출신이라는 이유로 그의 출세를 번번히 반대했고 함양 학사루에 걸어놓은 유자광의 시판을 김종직이 철거하면서 자신을 무시한 사건으로 개인적인 감정도 품고있었습니다.

    유자광은 노사신, 윤필상 등 훈구파 대신들을 움직여 1948년 7월 1일 이들은 연산군을 찾아가 김일손 등이 쓴 사초의 내용을 비밀리에 알리게 됩니다.

    도승지 신수근이 사관의 참여를 막았기 때문에 사관이 배석하여 대화내용을 기록할수 없었고 사림파들의 왕권 견제에 불만이 많던 연산군은 내용을 보고받은 후 사초를 왕에게 올리라는 전대미문의 명을 내렸고 사건이 불거지기 시작합니다.


  • 안녕하세요. 유영화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성종이 훈구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등용된 사림파(주로 3사에 진출하여 국왕을 자문함)가 날로 세력이 커지자, 훈구파와의 반목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때마침 <성종실록> 편찬 사업이 시작되자, 훈구파의 이극돈이 김일손이 주도한 사초에 들어 있는 김종직의 ‘조의제문(弔義祭文)’의 내용이 세조가 단종으로부터 왕위를 빼앗은 사실을 비방한 글이라 하여 문제삼아 유자광 등의 훈구 세력이 연산군을 충돌질하였습니다.

    이에 연산군이 김일손 등을 심문하고, 김종직의 관을 파헤쳐 시체의 목을 베게 하였으며, 사림파에 속한 많은 신하들을 처형하거나 귀양보냈다. 당시 사초 때문에 일어난 사화라 특별히 모오사화(戊午史禍)라 합니다.(1498)


  • 안녕하세요. 김기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1498년 성종실록을 편찬하자 실록청 당상관이 된 이극돈은 김일손이 사초에 삽입한 김종직의 조의제문이 세조가 단종으로부터 왕위를 빼앗은 일을 비방한 것이라고 하고 이를 문제삼아 사림파를 싫어하는 연산군에게 고하게 됩니다. 사림파인 김일손이 훈구파 이극돈의 비행과 세조의 찬탈을 사초에 기록한 일로 김일손과 이극돈 사이에 반목이 생겼고 유자광과 이극돈은 김종직 일파를 증오하옂보복한 것입니다. 연사군은 김일손 권오복 등 사림파들을 선왕의 무록한 죄로 죽이고 정여창 강겸 등은 귀양을 보냈습니다. 한편 이극돈 유순 윤효손 어세겸 등은 수사관으로서 보고하지 않은 죄로 파면되었습니다. 사초때문에 벌어진 정변이기에 사화라고도 합니다.


  • 안녕하세요. 장세영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무오사화는 조선 연산군 4년인 1498년에 발생한 훈구파의 사림파 제거 사건을 말합니다.


    조선 세조의 즉위를 도왔던 공신과 척신들은 모두 훈구 세력으로서 조선의 정치를 이끌었습니다. 성종은 이들을 견제할 목적으로 사림 세력을 대거 뽑았습니다.


    사림은 훈구 세력의 부정부패를 비판하였고, 심지어 세조의 즉위는 왕위 찬탈로서 성리학적 명분론에 어긋나는 행위라고 인식하였습니다. 이러한 모습들로 훈구와 사림은 대립하고 갈등하였습니다.


    그러던 가운데 연산군 시기에 성종실록을 편찬하면서 제작의 기반이 될 사초를 수집하였습니다. 그런데 사관 김일손이 제출한 사초에 세조 시기에 대한 명확하지 않은 헛소문들이 실려있었고, 특히 그의 스승인 김종직의 "조의제문"이 문제가 되었습니다.


    조의제문은 김종직이 중국 초나라의 왕 의제의 죽음을 기리는 글로, 의제는 항우에게 살해당했습니다. 이는 곧 단종을 몰아내고 죽인 세조를 저격하는 것이며, 더 나아가 세조-예종-성종-연산군으로 이어지는 왕위 계승의 정통성을 부정하는 일이었습니다.


    안 그래도 사림파 대간들의 행동에 불만이었던 연산군은 "김종직의 무리들이 몰래 당을 짓고 세조를 비방한 대역"으로 간주하여 사림 세력을 처벌하였습니다.


    이 사건은 훈구와 사림의 대립으로 나타났으나 실상 사건의 처리를 연산군이 주도하였습니다. 그 결과 대간의 견제 기능이 약화되었고 국왕의 전제적 성향이 강화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