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민족이 압록강 이북에 대한 영향력을 상실한것은 언제인가요?
고조선과 고구려의 영역이고 주무대였던 압록강 이북의 만주와 요동에 대한 한민족이 더이상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게 된 것은 어느 시점인가요?
안녕하세요. 이기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고대국가 시절에는 대부분 삼한의 한민족이 그 일대에 대한 막강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다고 봅니다.
전쟁으로 인해 쟁탈전은 있었어도 실질적으로 고구려 멸망 후 당에서 안동도호부를 세워 자신들이 한반도를 관리하려는 야욕을 부리던 시기를 제외하면, 항상 우리 한민족의 국토였습니다.
최종적으로 대진국 발해가 멸망한 이후에는 요, 원, 명, 청으로 지나오면서 요동 지역에 대한 영향력은 완전히 소실한 것으로 판단되고, 간도 즉, 만주 지역의 경우 청과 분쟁은 있었지만, 조선시대까지만 하더라도 우리의 영토로서 관리되었다고 여러 사료에서 확인되어집니다. 1712년 숙종 38년에 백두산정계비를 조선에서 세우면서, 비문에 서쪽으로 압록강, 동쪽으로 토문강을 경계로 한다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이에 조선에서는 송화강 상류가 토문강이므로 간도까지 조선의 영토로 확정하고 관리까지 파견하여 다스립니다. 청나라는 토문강이 두만강이라고 주장하였지만, 조선에서는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이후 일본이 을사조약을 근거로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강제로 박탈하고 청과 간도 지역에 대해 교섭을 벌여오다가 남만주철도부설권과 푸순 탄광채굴권을 얻는 조건으로 간도를 청에 넘겨주는 협약을 1909년 9월에 일본 마음대로 체결하였습니다. 이 이후부터 우리 한민족은 이 일대의 영향력을 상실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일본이 패망한 이후에도 우리는 그 지역을 돌려받지 못했습니다.
언젠가 통일이 되면 돌려받아야 하는 땅이라고 생각합니다.
만족스러운 답변이었나요?간단한 별점을 통해 의견을 알려주세요.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고려시대인 1084년 시점 압록강(鴨淥江) 연안 요 수비병의 규모는 1부, 1주, 2성, 70보, 8영에 합계 정병 2만2000명이었다’는 고려의 기록으로 압록강 근처 까지도 우리 지역이였던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남쪽은 요나라의 동경성에서 시작해 서북으로 황룡부에 이릅니다. 이 지명들을 보면 요나라의 동경성은 현 랴오닝성 랴오량(遼陽)시, 황룡부는 지린성 중북부입니다. 천리장성은 현 압록강변이 아니라 랴오허 유역에 있었던 것 입니다. 이러한 것이 조선 초로 넘어 오면서 압록강을 기준으로 명과 조선의 국경이 나누어 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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