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박했던 흥남 철수 과정에 대해 설명해주세요~
6.25전쟁 때, 우리군과 유엔군이 반격해서 서울을 다시 되찾고 북진하여 북한을 끝까지 몰아세웠다가 다시 중공군의 공격으로 남하했잖아요.
이때 흥남 부두에서 많은 우리 국민들이 발이 묶였는데, 탈출했던 사건이 흥남 철수 사건인데요.
그 과정이 어땠는지 설명 부탁드립니다~
안녕하세요. 황정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흥남 철수작전은 6·25 전쟁 중인 1950년 12월 15일부터 12월 26일까지 흥남에서 미군 10군단과 대한민국 국군 1군단 그리고 피난민 100,000여 명이 철수한 작전입니다. 유엔군이 북진통일을 눈앞에 두고 있을 때 중공군의 개입으로 인해 철수하게 되었습니다. 미 10군단에 속해있던 제1해병사단이 장진호 일대에서 중공군의 포위로 전멸할 위기에 처했고, 유엔군은 12월 8일 흥남철수 명령을 내리게 되었습니다. 함흥, 흥남 일대를 제외한 함경도 전역을 중공군이 장악었기에 퇴로가 끊겨 어쩔 수 없이 바닷길로 철수하게 되었습니다. 이 대규모 철수 작전은 193척의 선박을 동원하여 거의 피해 없이 성공적으로 마무리되었으며, 이 과정에서 100,000명의 피난민이 함께 구조되었습니다
만족스러운 답변이었나요?간단한 별점을 통해 의견을 알려주세요.안녕하세요. 윤지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흥남철수작전은 한국 전쟁 당시인 1950년 12월 중공군의 개입으로 전황이 불리해지자 북진 했던 미군과 한국군이 피난민과 함께 함경남도 흥남항에서 선박으로 철수한 작전입니다
만족스러운 답변이었나요?간단한 별점을 통해 의견을 알려주세요.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장진호전투에서 많은 피해를 입은 국군과 유엔군은 1950년 12월 원산이 적중에 넘어가 퇴로가 차단되자 흥남해상으로 철수할 수 밖에 없었고, 흥남 주변에 몰려든 10만 명의 북한주민들도 유엔군의 도움을 받아 선박으로 월남했습니다.
한국정부는 유엔군이 중공군에게 밀려 평양을 포기하게 되자 1950년 12월 4일 평양시의 전 행정기관을 철수시키고 38선 접경 및 그 이북 전역에 다시 비상계엄을 선포, 아울러 정부는 자유를 찾아 남하하는 50여만명에 달하는 이북 피난민동포 구출을 위한 긴급조치를 취했습니다.
1951년 1.4후퇴를 전후해 많은 북한 주민들이 북한을 탈출해 월남했고 중공군의 역습으로 가장 위급한 상태에 있던 유엔군은 육로와 동해해안 방면으로 신속히 후퇴했습니다. 이에 유엔 해군은 서해에서의 철수보다 흥남에서의 대규모 철수작전에 전력을 기울이게 되었습니다.
1950년 12월 당시 서부전선상으로 북진한 제 8군은 육로로 후퇴할 수 있었지만 동부전선 장진호 방면으로 북진한 미 제 10군단의 병력은 원산지역이 중공군에게 넘어가자 퇴로가 차단되는 지형특성상 해상으로 철수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는데 장진호 전투 시 하갈우리에는 현지주민을 비롯해 함흥 방면에서 올라온 주민들이 전투를 피해 주변 계곡이나 동굴에 숨어 있다가 미군이 진주하자 운집하고 있었습니다.
피난민들은 영하 27도의 추위 속에 중공군의 공격을 방어하면서 작전기지인 함흥, 흥남으로 후최, 원산에 주둔해있던 미 제 3사단도 중공군이 남쪽의 퇴로를 막아 이곳으로 이동했는데 이때 집결 병력은 10만 5천 여 명이었습니다.
1950년 12월 9일 맥아더 원수의 철수 명령이 하달되었고 곧 미합참의 철수를 승인함으로써 흥남철수작전이 개시, 같은 해 12월 11일부로 미 제 1해병사단의 병력과 장비가 탑재되기 시작해 같은 달 14일 선적이 완료되었으며, 같은 달 15일 흥남부두에서 출항했습니다.
이후 축차적으로 유엔군 부대와 국군 제 1군단이 12월 23일 까지 흥남철수를 완료, 미 제 10군단장 알몬드 장군은 처음 6백만 톤이나 되는 무기와 장비를 수송해야 해 피난민 수송이 어렵다고 했으나 국군 제 1군단장 김백일 장군과 통역인 현봉학의 설득으로 마지막에 남는 공간에 피난민 수송을 허락했습니다. 피난민 승선이 허락되자 부두는 아비규환의 수라장으로 변했는데 LST 한척에는 정원의 10배가 넘는 5천여 명이 승선했으나 30만의 인파 중 마지막까지 배를 탄 피난민은 9만 1천 여명이었습니다. 피난민 승선으로 4백톤의 폭약과 차량, 장비 등 5백 60만 톤의 장비가 유기되었으며 승선이 끝난 후 해군 함대와 폭격기가 집중사격을 가해 폭파시켰습니다.
흥남철수작전은 여러 기록을 남겼는데 10만명이 넘는 병력과 17,500대의 각종 차량, 35만톤의 물자를 함정으로 완전하게 철수시켰고 그 과정에서 한국군 지휘관들의 강력한 주장으로 남행을 결심한 피난민 9만여명까지 포함되었습니다.
또 항공기를 이용해 병력 3600명과 차량 196대, 1300톤의 물자를 철수시켰습니다.
만족스러운 답변이었나요?간단한 별점을 통해 의견을 알려주세요.안녕하세요. 김기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한국전쟁 때인 1950년 12월 중국군의 개입으로 전황이 불리해지자 북진했던 한국군과 UN군이 피난민과 함께 함경남도 흥남항에서 선박으로 철수한 사건입니다. 일명 1.4후퇴를 상징하는 사건입니다. 미군은 군함에 있는 무기를 버리고 피난민을 태웠던 것으로 유명하며 이 시기에 피난민 숫자가 10만 명에 이를 정도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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