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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뜻한아비34
산뜻한아비3423.01.10

명성황후는 시해 사건이 무엇이나요?

조선에서 명성황후가 죽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이것이 명성황후 시해 사건이나요?

명성황후 시해 사건이 정확하게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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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개의 답변이 있어요!
  •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1894년 청일전쟁을 일으키며 경복궁을 점령한 일본은 조청상민수륙무역작정을 폐기하고 조선정부에 친일 내각을 구성합니다.

    전쟁에서 북양군을 와해시킨 후 시모노세키 조약을 체결하여 조선의 자조, 독립 및 요동반도와 타이완 섬 할양 , 전쟁배상금을 받습니다.

    러시아는 독일 ,프랑스를 끌어들여 일본에게 요동반도를 청나라에 반환할것을 요구, 3개 열강의 압박으로 일본은 요동반도를 반환하게됩니다.

    러시아와 우호적으로 외교를 했던 고종과 명성황후는 러시아를 통해 일본을 견제 할 수 있을 것으로 보고 러시아 공사 카를베베르를 자주 불러 조-러 간의 공조를 논의하였습니다.

    이에 친일내각에 대한 축출을 하고 일본 공사관 및 일본인 도문단의 지지를 받던 어윤중, 김윤식 등 친일 성향의 관료들이 고종과의 마찰, 박영효가 주도한 조의연 파면 등에 책임을 물어 축출, 이완용을 중심으로 한 친러 성향의 관료들이 중용됩니다.

    친일 대신이었던 박영효는 명성황후가 자신의 숙청을 계획하고 있다는 정보를 듣고 명성황후 암살의 모의하지만 을미사변의 가담하는 유길준의 내부고발로 실패하고, 박영효가 명성황후 암살미수사건 혐의로 수배되며 친일관료들이 중앙에서 쫓겨나고 일본의 입지가 좁아집니다.

    망명한 박영효의 말에 따라 일본은 조-러 간의 비밀협약 의혹을 신빙성있게 여기고 일본의 향후가 외교방침 전환을 위해 이토내각과 정계, 육해군부 내에서 갑론을박이 있었으며 유신지사이자 당시 조선공사 이노우에 가오루의 오랜정적이었던 다니 다테키의 추천을 받아 새로 조선공사로 부임한 퇴역 육군 중장 미우라 고로가 조-일 외교의 전면에 등장하며 배후로 추정되는 일본 당국 관계자들은 미우라로 하여금 명성황후를 시해함으로 국면은 전환코자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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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김동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명성황후는 우리 조선이 500년 역사의 종말을 보는 마지막 비극이며 한(恨)스런 사건의 여주인공입니다. 그녀는 민비로 조선을 마지막 구하려는 작은 방파재로 몸을 던졌다가 시아버지 흥선 대원군으로부터 임오군란 때 죽임을 당할 뻔 했고, 그녀의 명석한 두뇌로 청(淸)나라와 일본, 그리고 러시아의 주변 3국을 이용하여 나라를 지키려다 결국은 힘의 논리로 희생된 비운의 여인입니다.

    그녀의 한계나 흥선 대원군의 모자람은 누구를 원망할 수 없는 우리 민족의 당시 무능함 입니다.

    대원군도 정조의 죽음 이후로 안동 김씨들의 세도정치로 나라가 피폐된 것을 구하려고 외척들의 세도정치의 뿌리를 끊고, 왕권 회복을 위해 경복궁을 중건(重建)하려다 나라의 재원을 탕진하여 당시 대원군이 국제정세를 몰라 쇄국정치라는 악수(惡手)를 두었습니다. 대원군도 초기에 쇄국을 하려고 하지는 안했으나 내치(內治)의 한계로 그리 택했습니다.

    민비도 처음에는 자기가 세도정치의 모순을 막기 위해 택함을 받은 시아버지 대원군과 맞서려고 생각하지 않으려 하였으나 첫 아이의 죽음 이후로 원수관계가 되고 또 그 때 임오군란 수습후 조선조정의 한계를 느껴 초기에는 청에 의지하였으나, 청일전쟁(淸日戰爭)에서 청이 패한 후 여러 사건 이후 일본을 견제할 세력이 러시아라는 믿음으로 친러 정책을 썼습니다.

    이 때 승리한 일본은 조선에 진출할 수 있는 발판을 확보했지만, 시모노세키 조약을 맺은 직후 곧바로 러시아.프랑스.독일의 3국 간섭을 받았습니다. 이 때 조선 정부 내에서는 일본의 침략을 견제하기 위해 러시아와 관계를 강화하려는 움직임이 나타났습니다.

    일본은 친러 세력의 중심에 민비가 있다고 판단한 일본 공사 미우라 고로(三浦梧樓)는 공사관직원들과 일본군 수비대원 및 일본 낭인을 동원하여 1895년 10월 8일에 이른바 명성황후 시해사건인 암호명 '여우사냥'을 저질렀습니다. 그러나 한심한 조선 조정은 고종을 포함해 어떤 대책도 못 세우고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하는 아관파천(俄館播遷)이라는 대책 밖에 못세웠습니다.

    우리는 지금 친일파 논쟁 같은 한심한 짓거리를 하는데, 자기나라 왕비가 저렇게 능욕 당하고도 총 한 방도 못 쏘며 일본을 응징도 못하는 우리 과거사를 반성해야지 누가 누구를 단죄합니까?

    사실 자기 며느리인 민비를 시해하도록 묵인한 대원군도 정말 파렴치한 노욕(老慾)의 인물이며, 당시 고종의 그런 무능은 고종 개인 뿐 아니라 당시 관리들 전부의 책임입니다.

    얼마나 망해가는 조선의 한 여인이 그리 무서웠으면 일본, 저 쳐죽일 일본이 민비 시해를 주도했습니까? 그러나 그 결과에 조선의 어느 한 사람의 군인이나 의병도 나서서 응징을 하지 않은 슬픈 우리 역사에 명성황후의 그 노래만 애절하게 들릴 뿐 입니다. 이제 지금도 우리는 일본을 칠 힘이 없다는 것 이 한스러울 뿐 입니다.

    명성황후는 일본의 이노우에 가오루(주범)가 종범인 미우라 고로에게 시켜 시해하고 시신에 능욕을 보이고 태워 죽인 천인공노할 만행 입니다.

    정말 우리는 지금부터라도 힘을 길러 일본을 응징해야 합니다.

    아무리 과거사라지만 반드시 그 댓가는 치를 수 있는 힘을 길러야 합니다.

    그리고 민비든 명성황후든 죽은 후에 부르는 것이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조선의 남자들이 얼마나 못나서 그랬습니까? 이 세상에 사는 모든 사람들 다 여자 뱃 속에서 열 달 있다 나왔습니다.

    다시 오죽했을까 생각합시다. 여걸이든 아니든 그것은 지금 독도를 두고 벌리는 일들에 대해 우리가 어떻게 해야할 것인가 깊이 생각하고 대처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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