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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 호수로 떠난여행
하늘 호수로 떠난여행23.11.27

동학농민혁명을 시작하게 된 배경이 어떻게 되는 것인지 궁금합니다.

조선시대 고종31년 전봉준을 중심으로 해서 봉건체제개혁을 위해 봉기를 했던 것이 바로 동학농민혁명이라고 하는데 이 농민혁명이 시작을 하게 된 배경이 어떻게 되는 것인지 궁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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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1860년 최제우에 의해 동학이 창시, 동학은 평등사상을 바탕으로 봉건사회를 반대하고 서학과 왜를 배척하는 반외세사상을 주장하면서 점차 그 교세가 확산됩니다. 이에 조선의 위정자들은 동학을 사교로 금지, 1864년 교조 최제우를 혹세무민의 죄로 처형한느 등 동학교도들에 대한 탄압을 지속합니다.

    그러나 동학 제 2대 교주 최시형에 의해 동학은 농민들을 중심으로 더욱 확산, 조직화되었고 이후 동학의 창시자였던 최제우의 억울함을 해소하고 동학교도들에 대한 탄압을 중지할 것을 요구하는 교조신원운동이 전개, 그러나 교조신원운동 이후에도 정부의 묵살은 계속되었고 여기에 전라도군수 조병갑의 불법착취와 동학교도 탄압에 대한 불만은 최고조에 이르게 됩니다.

    이에 동학교도들은 1894년 1월 전봉준을 중심으로 전라도, 충청도 일대 농민들을 모아 고부 관아를 습격, 고부민란을 일으키며 관아를 점령한 전봉준은 정부에 조병갑의 횡포를 시정할 것, 외국상인의 침투를 금하라는 등의 요구사항을 제시, 정부로부터 폐정을 시정하겠다는 약속을 받고 해산하나 고부민란을 조사하러 온 이용태는 민란 관련자들을 역적으로 몰아 탄압합니다.


  • 안녕하세요. 이명훈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동학 농민 운동은 전라도 땅 고부에서 시작된 농민 봉기가 발단이 되었습니다. 고부 땅은 농토가 기름지고 해산물이 풍부하여 사람 살기가 좋은 곳이었습니다. 그런데 1892년에 고부 군수로 부임한 조병갑의 횡포로 백성들의 살림살이가 아주 나빠지기 시작했고 이에 전봉준은 1894년 1월에 1천여 명의 농민들을 이끌고 고부 관아를 습격하여 횡포한 군수를 쫓아내고 관리들을 벌 준 후에 곡식 창고를 풀어 어렵게 살던 농민들에게 나누어 줬습니다. 뿐만 아니라 감옥을 열어 죄 없이 갇혀 있던 사람들을 모조리 풀어 주었죠.

    고부에서 농민 봉기가 일어났다는 보고를 들은 중앙 정부는 깜짝 놀라 조병갑을 군수 자리에서 쫓아내고 새로운 군수를 임명해 내려 보냈으며, 봉기가 일어난 원인을 파악하기 위하여 조사관인 안핵사를 고부로 보냈습니다. 신임 군수는 농민들에게 나쁜 정치를 없애겠다고 약속했고, 이 말을 믿은 농민들은 무장을 풀고 해산했습니다. 그런데 안핵사가 문제가 되었죠.

    사건을 조사하러 온 안핵사 이용태가 봉기의 책임을 농민들에게 모두 돌리며 주동자를 색출하여 옥에 가두고 마을을 약탈을 한겁니다. 이에 전봉준은 동학 교단의 지도자였던 김개남, 손화중과 손을 잡고 제폭구민, 보국안민을 구호로 본격적인 투쟁을 시작 했습니다.

    전봉준이 정부와 싸움을 시작하며 전라도 부안 땅에 있는 백산으로 사람들을 모이게 하자, 목숨을 걸고 달려온 농민들이 8천여 명에 달했으며 그 기세가 하늘을 찌를 듯 했습니다. 백산에 모여든 사람들의 모습이 서 있을 때는 입고 있는 흰 옷 때문에 산 전체가 백색으로 보였고, 앉아 있으면 머리 위로 솟은 대나무 창 때문에 대나무 산으로 보였다고 합니다.

    그래서 “앉으면 죽산, 서면 백산”이라는 이야기까지 나왔죠. 동학 지도부는 백산에서 다음과 같은 격문을 발표하고 정부를 상대로 투쟁에 들어갔습니다.

    우리가 의로운 깃발을 들어 이곳에 온 것은 그 뜻이 결코 다른 데 있지 아니하다. 세상의 모든 사람을 어려움 속에서 건지고 국가를 튼튼하게 하기 위함이다. 안으로는 탐학한 관리의 머리를 베고 밖으로 횡포한 강적의 무리를 쫓아내고자 함이다.


  • 안녕하세요. 유영화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개항 이후 개화 정책이 추진되고 외국과의 교역이 늘어갔지만, 국가 재정은 악화되고 농민 생활은 갈수록 궁핍해졌습니다. 민씨 일파의 권력 독점과 횡포가 갈수록 심해지고 매관매직이 성행하는 등 국가 기강이 문란해지자, 수령들이 가혹하게 농민을 수탈하여 농민의 불만이 크게 높아졌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내륙 시장까지 진출한 청·일 상인이 영국산 면직물 등을 팔고 곡물을 대량을 가져갔습니다. 그 결과 농민 사이에서는 지배층의 수탈과 외세의 경제 침탈에 대한 반감이 커지면서 농민 봉기가 곳곳에서 일어났습니다.

    또한 동학은 모든 인간은 존엄하며 누구나 평등하다는 사상과 외세를 배격하는 주장을 내세워 지배층의 수탈과 외세의 경제 침탈에 시달리던 농민층에 큰 호응을 얻었습니다. 특히 2대 교주 최시형이 포접제와 경전을 정리하여 삼남 일대에 동학교도가 크게 늘어났습니다.

    동학 농민 운동의 시작은 고부 농민 봉기입니다. 전라도 고부군수 조병갑자 군민들을 가혹하게 수탈하고, 탄압하자 1894년 1월 고부 접주 전봉준이 사발통문을 돌리고 고부 관아를 습격하면서 시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