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하
검색 이미지
역사 이미지
역사학문
역사 이미지
역사학문
활달한거북이38
활달한거북이3823.03.17

조선시대 방곡령은 왜 선포 했나요? 성공했나요?

우리 조선 시대는 농업사회로 알고 있습니다.

농업이 국가의 근본이었고 그래서 쌀 등 곡식이 중요한 재원이었다고 알고 있는데,

이러한 중요한 근본인 쌀 등 곡식을 지키기 위해

수출금지를 했었다는 내용을 확인 할 수 있었는데요.

곡물 등 수출을 금지한 방곡령은 왜 선포했고 그리고 성공했었는지 궁금합니다.

55글자 더 채워주세요.
답변의 개수9개의 답변이 있어요!
  • 탈퇴한 사용자
    탈퇴한 사용자23.03.17

    안녕하세요. 이승원 인문·예술 전문가입니다.

    개항 이후 일본의 경제 침탈에 맞서 시행한 정책입니다. 방곡이란 ‘곡물을 막는다.’는 뜻으로, 조선에서 재배한 곡물이 일본으로 흘러나가는 것을 막는 조치였으나 일본의 압력으로 인해 제대로 시행되지 못하고 대부분 철회되었습니다.

    강화도 조약의 체결로 조선에서의 상업 활동이 쉬워진 일본 상인들은 쌀이나 콩 등 조선의 곡물을 싼 값에 사들인 뒤 일본으로 가져가 많은 이익을 남겼다. 하지만 일본으로 나가는 곡물의 양이 너무 많아지자 조선에서는 곡식 값이 크게 오르고 백성들이 굶주리는 현상이 나타났다. 이에 조선 정부는 방곡을 위한 조치를 내렸다. 1883년 일본과 맺은 조일 통상 장정의 규정에도 1개월 전에 미리 통보할 경우, 방곡을 할 수 있었다.

    하지만 방곡령은 일본의 압력을 받아 제대로 시행되지 못했다. 1889년 황해도의 방곡령, 1890년 함경도의 방곡령, 황해도의 방곡령은 조선과 일본 사이에 외교 문제로 이어지기도 했다. 황해도와 함경도 관찰사들이 방곡령을 내리자, 일본은 한 달 전에 미리 통보를 하지 않았다는 이유를 들어 방곡령의 철회와 손해 배상을 요구했다. 하지만 지방 관리들은 쉽게 방곡령을 철회하지 않았고, 일본은 지방 관리들의 처벌을 요구하면서 손해 배상 요구액을 더욱 늘려 갔다. 결국 조선 정부는 일본의 요구대로 방곡령을 철회하고 배상했다. 방곡령을 둘러싼 외교 분쟁에서 조선 정부가 이렇듯 일본에게 굴복하면서 일본의 경제 침탈은 더욱 심화되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방곡령 - 조선의 곡물이 일본으로 흘러나가지 않도록 내린 명령 (한국사 사전 2 - 역사 사건·문화와 사상, 2015. 2. 10., 김한종, 이성호, 문여경, 송인영, 이희근, 최혜경, 이승수)


  • 일본은 근대화로 쌀 수요가 많아졌고 부족한 쌀들을 조선에서 수입해 갔습니다.

    조선은 가뭄과 흉년이 겹치면서 식량난에 민심이 좋지 않게 되자

    조선 정부, 지방관들은 방곡령을 내립니다.

    쌀과 같은 곡물을 해외로 반출을 금하게 된 것입니다.

    함경도 관찰사였던 조병식은 일본에 방곡령을 통보했으나

    규정대로 1개월 전에 통보한다는 예고 기간이 맞지 않다고

    일본과 무역분쟁이 일어난 사건이 방곡령 사건입니다.

    결국 조선은 일본에 배상금까지 부담하면서

    방곡령 사건은 굴욕적 불평등한 관계의 대표적인 사건입니다.

    안녕하세요. 이병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 안녕하세요. 박세공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강화도 조약 체결후 상업 활동이 더욱 쉬워진 일본 상인들이 쌀, 콩등 값싸게 사가 일본에 되팔아 막대한 수입을 올렸습니다. 일본에 나가는 곡식이 너무 많아져 조선에서는 곡식값이 오르고 백성들이 삶이 더욱 어려워지자 조선정부는 방곡령을 발표해서 곡식의 수출을 막았습니다.

    그러나 일본은 손해배상을 요구하고, 방곡령 철회를 요구하였고,

    힘없는 조선 조정은 손해 배상을 해주고 방곡령을 철회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 안녕하세요. 박정욱 인문·예술 전문가입니다.

    조선시대의 방곡령은 국내 곡식 공급을 보호하기 위한 대책 중 하나였습니다. 이는 국내에서 생산된 곡식을 외국으로 수출하지 않고 국내 소비로 제한하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방곡령은 1397년에 최초로 제정되었으며, 그 후에도 여러 차례 개정되었습니다. 이는 조선시대의 경작지가 제한적이었기 때문에 수확량이 부족하고 기후변화 등으로 인해 농작물 수확이 불안정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국내 곡식을 지키기 위해서는 수출을 제한하는 대책이 필요했습니다.

    방곡령의 성공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 조선시대의 농업 생산성은 그리 높지 않았기 때문에 수출을 금지하면 국내에서 소비하는 데에 충분한 곡식을 확보할 수 있었습니다. 둘째, 외국으로 곡식을 수출하면 국내 곡가격이 급등하는 현상이 발생했기 때문에 수출 금지로 인해 국내 곡가격 안정에도 도움이 되었습니다. 셋째, 국내에서 곡식을 구입하는 농민들에게는 경제적 이익이 있어서 방곡령의 준수가 이루어졌습니다.

    하지만, 이와 같은 방곡령이 모든 시기에 항상 효과적이었던 것은 아닙니다. 일부 시기에는 방곡령 무시로 인한 수출이 발생하기도 했고, 수확량이 부족해지면서 국내 곡식 부족 문제가 발생하기도 했습니다. 따라서 조선시대의 곡식 안정을 위해서는 방곡령 뿐만 아니라 다양한 대책이 필요했습니다.


  •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19세기 말 1876년 개항 이후 일본으로의 미곡 수출이 증대되면서 곡물가격이 뛰고 품귀현상 마저 나타났다고 합니다. 거기에 가뭄으로 흉작까지 겹치게 되자, 지방관들은 자기 지방에서 생산된 미곡이 타지방 또는 외국으로 유출되는 것을 방지하고자 이른바 방곡령을 실시했습니다. 방곡령을 둘러싸고 4년간이나 지속되었던 한일 간의 외교적 분규는 종식되었지만 그러나 이후 일본인들에 의한 침탈은 날로 심해져 유통은 물론 생산과정에까지 침투, 조선의 경제를 유린 했습니다.


  • 안녕하세요. 정광채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조선시대 방곡령은 1429년에 제정된 법령으로, 전국적으로 성토를 조사하고 그 기록을 통해 세입과 세출을 산출하는 등, 조세 수입을 개선하기 위해 실시되었습니다.


    당시 조세 수입이 부족하여 국가 재정이 어려웠는데,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방곡령이 실시되었습니다. 방곡령은 정확한 토지의 크기와 경작 인력 등을 파악하여, 지급해야 할 조세의 정확한 금액을 산출하는 데 사용되었습니다. 이를 통해 조세를 더욱 투명하게 징수할 수 있게 되었으며, 이후 국가 재정이 안정적으로 운영될 수 있었습니다.


    또한 방곡령은 농업과 관련된 정보를 수집하기 위한 목적도 가지고 있었습니다. 방곡령의 조사 결과를 토대로 토지 분배를 조정하고, 토지의 경작 방식을 개선하는 등의 농업 정책을 수립할 수 있었습니다. 따라서 방곡령은 국가 재정의 안정화와 농업 발전을 위한 중요한 제도로 평가되어 왔습니다.


    방곡령이 성공적인 결과를 가져왔다고 평가하기는 어렵습니다. 방곡령은 조세 수입을 개선하고 국가 재정을 안정화시키는 데 일부 도움을 주었지만, 이에 따른 부작용도 발생하였습니다.


    먼저, 방곡령이 시행되면서 농민들은 성토 조사를 위해 많은 시간과 노력을 쏟아야 했습니다. 이로 인해 농사 일정에 지장이 생겨 생산량이 감소하였으며, 농업 생산성이 낮아지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또한, 방곡령은 지역 감독관들에게 많은 권한을 부여하였는데, 이를 악용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지방 감독관들이 조사를 과도하게 시행하거나 불필요한 요구를 하여 농민들의 부담을 늘리는 일이 발생하였습니다.


    방곡령 시행 이후 조세 수입이 증가했지만, 이는 상당 부분 농민들의 부담 증가로 인한 것이었습니다. 이에 따라 농민들은 과세에 대한 불만을 가지게 되었고, 이후 농민들의 반란 등의 사건도 발생하였습니다. 따라서 방곡령은 부작용이 많은 제도였지만, 조세 수입 증가와 농업 발전을 위한 기초 자료를 확보하는 데 일정한 역할을 한 것은 사실입니다.


  • 안녕하세요. 김종호 인문·예술 전문가입니다.

    1876년 조일수호조규(朝日修好條規)에 의해 개항된 이후 일본 상인들이

    개항장을 중심으로 조선에 진출하였고, 조선 쌀과 콩 등 곡물을 매집(買集)

    하면서 정작 조선 내에 곡물 부족 및

    곡물가격 상승 현상이 발생하였다.

    이에 지방관들을 중심으로 곡물의

    반출을 금지하는 방곡령(防穀令)을

    내리기도 하였지만 일본 측은 이에

    반발하여 방곡령을 철회시키거나

    조선 정부를 상대로 손해배상을

    요구하였다.

    -출처:나무위키


  •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1876년 강화도 조약으로 일본에 개국한 이래 일본상인들은 우리 농촌에 침투하여 갖은 방법으로 쌀, 콩 등을 매점해서 이를 일본으로 반출시켰는데 통제를 받지 않고 곡물이 계속 반출되자 곡물의 절대비축량이 부족하여 식량난을 증가시켰고, 1888년 흉년이 들어 굶주리는 백성들을 구제할 방도가 없게 되자 전국 여러곳에서 연달아 폭동이 일어났고 이에 곡물수출항인 원산을 관장하던 함경도 관찰사 조병식은 1889년 9월 한일통상장정 제 37관을 근거로 원산항을 통하여 해외로 반출되는 콩의 유출을 금지하는 방곡령을 발포했습니다.

    그러나 담당관원의 실수로 예고기간이 부족하여 일본 무역상들이 타격을 입게 되자 한일간에 분규가 일어났고 정부는 일본의 항의로 조병식에게 방곡령 해제를 명하나 오히여 일본상인들로부터 곡식을 압수하는 등 강하게 밀고나갔습니다.

    일본이 조병식의 처벌과 손해배상을 요구하자 조병식을 강원도관찰사로 전출시켜 방곡령을 해제했으나 새로 함경도 관찰사로 부임한 한장석도 1890년 곡물수출의 폐해를 들어 이를 금지하도록 건의하자 원산항의 방곡령을 다시 시행, 이어 황해도 에도 방곡령을 내렸습니다. 이에 일본은 1891년 11월 방곡령으로 일본상인이 입은 손해배상이라 하여 14만 7168환을 요구하며 양국 간에 조정을 시도하나 해결되지 못했고 일본이 1893년 다시 배상금에 이자를 합산해 17만 5000환의 지불을 강요하자 정부는 청나라의 권고에 따라 일본의 요구를 받아들여 배상금 11만환을 지불하기로하고 , 1893년 4월 이문제를 해결합니다.

    방곡령은 이후에도 부분적으로 시행되다가 1894년 1월 전면해제되었습니다.


  • 안녕하세요. 강요셉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방곡은 지방 수령이 지역의 곡물 반출을 금지시키는 것으로서 조선 후기 물 유통 상의 폐단으로 지적되어 왔는데 재해등으로 곡물이 부족한 지역에서 수령이 곡물을 반출하는 것을 금지 시키기도 했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방곡을 실시하여 곡물 가격을 등귀 시켜 이익을 보는 수단으로 활용하기도 했습니다 1876년(고종13)개항 이후 조선의 쌀이 일본으로 대량 수출되면서 국물 부족 현상이 일어났으며 이로 인해 지방관이 방곡령을 내려 쌀의 유출을 제한한것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