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야에 임나일본부 가 진짜 있언던 사실인가요?
임나일본부가 가야에 있었다고 하는데
임나일 본부가 정확히 무엇이고 , 왜 사실이 아니라고 하는 말이 있는지 알고싶습니다.
알려주세요.
안녕하세요. 이승원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일본 야마토정권이 4세기 후반 한반도 남부 지역에 진출, 가야에 일본부(日本府)라는 기관을 두고 지배했다는 주장으로, 일본의 한국사 왜곡 사례 중 하나. 2010년 3월 한ㆍ일 역사공동연구위원회에서 사실이 아니며, 용어 자체를 폐기하기로 합의함
일본의 야마토정권이 4세기 후반 한반도 남부 지역에 진출해 백제·신라·가야를 지배하고, 특히 가야에는 일본부(日本府)라는 기관을 두어 6세기 중엽까지 직접 통치했다는 주장이다. 고대의 한반도 남부 전체가 일본의 지배하에 있었다는 논리가 되어 '남선경영설(南鮮經營說)'이라고도 한다.
임나일본부에 대한 연구는 17세기 이래 소위 일본의 국학파들에 이해 주목된 이래, 19세기 후반의 일본의 제국주의화와 더불어 문헌고증학자들에 의해 부연 설명되었으며, 이후 '일선동조론'과 더불어 일제의 한국침략과 지배를 정당화하는 도구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일본이 내세운 임나일본부설에 대한 증거로는 일본 고대사서인 <일본서기(日本書紀)>의 내용과 일본의 고대 도검류 유물인 '칠지도', '광개토대왕비문', 중국의 <송서(宋書)> 왜국전(倭國傳) 등이 있다.
<일본서기>는 720년에 편찬된 책으로, 이 책에 의하면 신공황후가 보낸 왜군이 369년에 한반도에 건너와 7국과 4읍을 점령하였고, 그 후 임나에 일본부가 설치되었으며, 562년에 임나가 신라에 의해 멸망한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런데 신공황후가 정벌한 7국의 지명을 고증한 결과 그곳이 당시의 가야지역이었으며 따라서 임나는 가야를 가리키는 것이라는 임나일본부설의 주장이다. 그러나 <일본서기>의 내용은 여러 가지 모순된 사실을 기술하고 있는 등 그 신빙성과 사실성이 의문시된다.
'칠지도(七支刀)'는 일본의 이소노카미 신궁(石上神宮)에 보관되어 있던 것인데, 1873년 신궁의 다이쿠우시(大宮司·주지격)인 간 마사모토(菅政友)가 칼에 새겨진 금상감(金象嵌) 기법의 글자들을 해석하여, 고대 도검류 유물인 '칠지도'가 백제에서 왜(倭) 왕실에 헌상했다는 <일본서기> 신공기(神功記) 52년 기사에 나오는 바로 그 칠지도(七枝刀)라고 주장하였다. 이후 칠지도는 백제가 왜(倭) 왕실에 하사한 것인지, 헌상한 것인지, 아니면 단순히 우호의 표시로 증여한 것인지, 그 성격을 둘러싸고 한·일 두 나라 학계에서 첨예한 공방을 벌이는 유물이 되었다.
특히 1883년 일본 사학자들은 중국 지안(集安)에 있는 광개토대왕 비문(碑文)에서 '왜이신묘년래도해파백잔라 이위신민(倭以辛卯年來渡海破百殘 ○○○羅 以爲臣民ㆍ ○는 알 수 없는 글자)'을 발견하고, 이를 "왜가 신묘년에 바다를 건너와서 백제와 신라를 격파하고 신민으로 삼았다."고 해석해 <일본서기(日本書紀)>에 나온 임나일본부설을 뒷받침하는 자료라고 주장해 왔다. 이에 대해 위당 정인보 이래 남북한 역사학계는 '倭以辛卯年來渡海破百殘羅 而爲臣民'의 문장을, '파(破)'까지 한 문장으로 끊어 '왜'가 아닌 '고구려'를 주어로 '고구려가 신묘년에 일본을 무찔렀다.'고 해석해 왔다.
이렇듯 '임나일본부설'은 한·일 양국 학계의 최대 쟁점이 되었다. 이에 한국 측은 <일본서기>보다 먼저 서술된 <고사기>에는 임나일본부에 대해 전혀 언급된 바가 없으며 고고학적 근거도 없기 때문에 당시 가야에서 군사적인 활동을 벌인 것은 일본이 아니라 백제라고 주장해 왔다.
한편, 양국 간의 역사왜곡 논란이 지속되던 중 2001년 일본 후소샤 역사교과서 왜곡 파문을 계기로 2002년 한ㆍ일 역사학자들로 구성된 한ㆍ일 역사공동연구위원회를 출범시켰다. 이후 지속적인 연구 끝에 양국 공동위원회는 2010년 3월 23일 발표한 제2기 최종연구보고서에서 4~6세기 당시 야마토정권이 한반도 남부에서 활동하면서 임나일본부를 설치해 지배했다는 주장은 근거가 없다는 데 의견을 같이하고, 임나일본부설에 대한 일본 교과서의 내용을 폐기하는 데 합의했다.[네이버 지식백과] 임나일본부설 (시사상식사전, pmg 지식엔진연구소)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일본에서는 4세기 후반 가야에 임나일본부를 두어 식민지로 삼았다고 주장하는데 이는 광개토대왕릉 비문을 가지고 주장합니다.
비문의 내용 가운데 한국과 일본의 학자들 사이에서 논란이 되는 부분으로는 '신묘년에 왜가 바다를 건너와 백제, 00, 신라를 격파해 신민으로 삼았다.' 신묘년은 광개토대왕 1년으로 4세기 후반, 이때 일본이 백제와 신라를 신민으로 삼았다는 것입니ㅏ.
일본은 이부분을 강조해 4세기 후반 왜가 한반도 남부 지역을 식민 통치했다고 주장합니다.
안녕하세요. 이주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임나일본부설 [任那日本府說]
야마토 왜의 '남선경영설(南鮮經營說)'이라고도 불린다. 이 주장은 현재 일본의 교과서에 수록되어 일본인의 한국에 대한 편견과 우월감을 조장하고 있다. 일본의 임나일본부에 관한 연구는 이미 17세기 초에 시작되어 19세기 말에는 본격적인 문헌고증에 의해 정설로 뿌리를 내림과 동시에 각국에 소개되었다. 이를 통해 3세기경에는 외국에 식민지를 건설할 정도로 일본의 고대사회가 발전하였다는 논리로 나아갔고, 한편으로는 일본 제국주의의 한반도 식민지배를 정당화하는 논리로 이용하였다.
이처럼 임나일본부설은 일본의 한국에 대한 제국주의적 침략행위를 과거로의 환원으로 정당화하는 도구로 사용되었으며, 일본인과 한국인은 본래 같은 뿌리에서 태어났다는 '일선동조론(日鮮同祖論)'과 함께 표리관계를 이루면서 35년간의 식민통치를 합리화하는 관념적 버팀대로서 기능했던 것이다. 따라서 식민사학의 극복을 논의할 때, 임나일본부설에 대한 비판과 부정이 빼놓을 수 없는 과제가 됨은 당연하다.임나일본부설의 근거로는 보통 4가지가 제시되고 있다. 그 중 핵심적인 것이 《일본서기(日本書紀)》에 적힌 내용이다. 《일본서기》에 의하면 진구황후[神功皇后]가 보낸 왜군이 369년 한반도에 건너와 7국(國)과 4읍(邑)을 점령하였고, 그뒤 임나(任那:伽倻)에 일본부가 설치되었으며, 562년 신라에 멸망하였다고 한다. 즉 일본은 369년부터 562년까지 약 200년간 한반도 남부를 지배했으며 중심기관이 가야에 두어진 임나일본부라는 것이다. 광개토대왕비(廣開土大王碑)도 그 주장을 뒷받침하는 것으로 거론되었다. 비문의 신묘년(391년) 기사를 "왜가 바다를 건너와 백제와 임나·신라 등을 격파하고 신민(臣民)으로 삼았다"고 해석하여, 당시 왜국의 한반도 남부 지배를 알려주는 결정적 증거라고 주장하였다.
한편 남조(南朝)·송(宋)·제(齊)·양(梁) 나라의 역사기록에 나오는 왜왕의 책봉기사도 들고 있다. 여기에는 왜왕이 "왜백제신라임나진한모한제군사왜국왕(倭百濟新羅任那秦韓慕韓 諸軍事倭國王)"이라는 관작(官爵)을 인정해줄 것을 요청하였고, 송에서는 백제를 제외한 나머지 지역에 대한 왜의 지배권을 인정하는 듯한 칭호를 내린 것으로 되어 있다. 그리하여 이소노카미신궁[石上神宮]의 칠지도(七支刀)도 왜의 군사적 우세와 한반도 남부 지배를 인정한 '번국(蕃國)' 백제가 야마토조정에 바친 것으로 해석되었다.그러나 '임나일본부'란 명칭은 《일본서기》의 6세기 전반에 해당하는 기록에는 빈번히 나타나지만 한국의 기록에는 전혀 나오지 않는다. 이 때문에 그 존재 여부조차 의심되었고 이에 대한 반론들이 제기되었다. 제일 먼저 나온 것이 북한학계 김석형(金錫亨)의 분국설(分國說)이다. 이 설에 의하면 삼한·삼국 시대에 수많은 사람들이 한반도에서 일본열도로 건너가 그곳에서 삼한·삼국의 식민지라 할 수 있는 분국들을 곳곳에 설치하였고, 이때 임나일본부는 일본열도 내에 수립된 가야의 분국 임나에 설치된 것이라는 것이다. 이 설은 광개토대왕비문이 석회가 발라져 변조되었다는 주장과 함께, 그 사실 여부보다는 근대 일본역사학의 '제국주의적 체질'에 대한 반성을 촉구하는 계기가 되었다는 점에 의미가 있었다.
현재 일본학계에서는 예전처럼 한반도 남부에 대한 식민지경영과 같은 주장은 거의 사라졌으나 임나일본부의 존재를 기내(畿內)의 야마토조정과는 무관한 규슈[九州]의 지방호족에 의해 설치되었다고 보는 견해로부터, 일본의 '출장소' 또는 '‘출장기관'과 같은 출선기관설(出先機關說) 등을 계속 주장하였다. 그러나 그것의 신빙성이 의심을 받자 이제는 선사시대부터 가야지역과 일본열도의 활발한 교류를 들어, 가야지역에 일부의 왜인들이 집단적으로 거주하게 되었고 이러한 왜인들을 통제하는 행정기관이 임나일본부였다는 '가야의 왜(倭)'설이나 왜의 식민지 지배기관이 아니라 가야에 파견된 왜의 사신들로 이해하는 외교사절설(外交使節說) 등 다양한 견해가 제기되고 있다.
반면 한국 학계에서는 대체로 임나일본부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고 있는데, 가야를 지배했다고 하는 《일본서기》의 '왜'가 실제로는 백제라는 견해와 한반도 남부지역에서 활동한 왜군을 백제의 용병으로 보는 백제군사령부설(百濟軍司令部說)이 있다. 최근에는 임나일본부는 왜의 통치기관이나 백제의 군사령부와 같은 것이 아니었으며, 임나(任那)와 안라(安羅)에 파견된 왜의 사신인 기비노오미[吉備臣]와 가와치노아타이[河內直]였다는 주장도 나왔다.
한반도 남부에서 활동했던 '왜(倭)'의 문제의 총합으로서 제기되는 임나일본부 문제는 한국고대사의 복원뿐만 아니라 한일관계사 및 동아시아 역사상(歷史像)의 재구축과 올바른 한·일관계 정립을 위해서도 중요한 문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