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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퇴한 사용자
탈퇴한 사용자24.01.17

조선의 기본외교정책인 사대교린은 무엇이고 언제부터 실행하였나요

안녕하세요 조선은 수많은 외세의 침입 막는 전쟁을 치뤘는데요 조선의 기본외교정책인 사대교린은 무엇이고 언제부터 실행하였나요 알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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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변의 개수2개의 답변이 있어요!
  • 안녕하세요. 임지애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사대는 중국, 교린은 왜국 및 여진에 대한 외교정책으로, 세력이 강하고 큰 나라를 받들어 섬기고, 이웃 나라와 대등한 입장에서 사귀어 국가의 안정을 도모한다는 조선 개국 이래의 외교방침이었습니다. 특히 중국에 대한 사대는 조선의 기본법전인 《경국대전》에 올려 이를 뒷받침하고있으며 1392년 7월 조선은 건국 직후에 명나라에 사신을 보내어 태조 이성계의 즉위를 알리고 조공을 바치면서 사대의 예를 행했다고합니다.


  • zudaish
    zudaish24.01.18

    안녕하세요. 이진광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사대교린(事大交隣)이란 조선의 전통적인 외교정책을 함축적으로 표현하는 말로서, 그 근원은 중국 고전에서 찾을 수 있다. 따라서 사대교린의 의미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선 사대교린이라는 말이 어떤 역사적 맥락 속에서 형성되었는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중국 고대 서주(西周) 시대에는 주왕(周王)이 각지에 제후들을 봉건(封建)하고, 제후국들이 주왕에게 조공(朝貢)을 바침으로써 주왕을 중심으로 한 정치질서가 유지되었다. 주왕은 천명을 받아 천하를 다스리는 것으로 설명되었으므로, 주왕에 대한 제후들의 조공은 당연한 행위로 인식되었다. 그러나 기원전 770년 이민족의 침입으로 주 왕실이 동쪽으로 옮기는 등 그 힘이 쇠퇴하여 춘추시대(春秋時代)로 이행하자 주왕을 중심으로 한 정치질서는 붕괴하였다. 이제 주 왕실이라는 중심이 미약해진 상황에서 새로이 성장한 열국(列國)들 사이에는 새로운 국제사회가 성립하였고, 여기서 빚어지는 문제들을 규율할 새로운 질서가 요구되었고, 이에 부응하여 나타난 것이 교린(交隣)의 이념이다.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에 따르면 당시의 교린이란 사대자소(事大字小), 즉 작은 나라는 큰 나라를 섬기고[事大], 큰 나라는 작은 나라를 사랑해주는[字小] 것을 이상적인 형태로 여겼다. 맹자(孟子) 역시 “이웃 나라[隣國]와 사귀는[交] 데 도가 있습니까?”라는 질문에 “오직 어진 사람[仁者]이라야 큰 나라로서 작은 나라를 섬길 수 있으며, 오직 지혜로운 사람[智者]이라야 작은 나라로서 큰 나라를 섬길 수 있습니다. 큰 나라로서 작은 나라를 섬기는 사람은 하늘의 이치를 즐거워하는 자요, 작은 나라로서 큰 나라를 섬기는 자는 하늘의 이치를 두려워하는 자이니, 하늘의 이치를 즐거워하는 사람은 천하를 보전하고, 하늘의 이치를 두려워하는 사람은 그 나라를 보전할 수 있습니다.”라 하여 교린의 도를 어진 사람[仁者]이 작은 나라를 섬기는 것[事小]과 지혜로운 사람[智者]이 큰 나라를 섬기는 것[事大]으로 나누어 파악하였다.

    이러한 언급을 통해 춘추시대 열국은 현실적인 세력관계의 강약에도 불구하고 예(禮)에 따라 소국이 대국을 섬기고, 대국은 소국을 돌보아줌으로써 열국간의 상호 공존 및 결속을 도모하는 것을 교린의 도로 여겼음을 알 수 있다. 여기서 교린이 사대(事大)와 자소(字小)를 포함하는 것이며, 대등한 국가간의 관계가 아니라 현실적 역량이 서로 다른 국가간의 관계를 포괄적으로 규율하는 개념임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렇게 중국 내의 열국간의 관계를 규율하던 교린이라는 개념과 그를 구성하던 사대·자소라는 단어는 춘추전국시대가 진시황에 의해 통일된 이후 동아시아 국제질서의 중심국인 중국과 그 이웃나라들의 관계에 대해 확대 적용되었다. 즉 대국인 중국은 이웃나라들의 군장(君長)을 왕으로 책봉(冊封)하여 그 나라를 보살피고, 이웃나라들은 중국을 대국으로 인정하여 사대하고 조공을 바침으로써 명목상 그 신하로 자임하는 책봉-조공 관계를 맺은 것이다. 이는 중국을 천하의 중심으로 여기는 중화사상과 중화와 오랑캐를 구분하는 화이사상에 의해 뒷받침되었다.

    책봉-조공은 교린의 이념으로서의 사대·자소를 제도적으로 구체화한 것으로서, 시대의 변화와 함께 끊임없이 그 외연과 내포를 변화시켜 갔다. 실제 역사상에서는 중국과 주위 국가들과의 관계가 책봉-조공의 명분에 맞게 진행된 것은 결코 아니었으며, 오히려 유목민족의 침입으로 인해 중국이 열세에 처했을 때는 유목민족들이 세운 국가와 정치적으로 대등한 관계를 맺는다거나, 신하를 칭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국의 기본적인 대외관계는 사대와 자소를 기본으로 하는 책봉-조공을 그 근간으로 하고 있었으며, 이는 19세기 후반 서양 세력이 침입해 올 때까지 지속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