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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한문어80
조용한문어8023.07.09

고려시대 때 강조의 정변을 일으킨 강조의 대의명분은 무엇이었나요?

목종이 불러서 온 강조가 갑자기 목종을 폐위시키고 현종을 왕으로 세운 이유가 무엇인가요?

강조가 정변을 일으킨 명분은 무엇이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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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변의 개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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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탈퇴한 사용자
    탈퇴한 사용자23.07.09

    안녕하세요. 정준영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고려 목종 12년(1009) 강조가 일으킨 정변. 서북면도순검사(西北面都巡檢使) 강조가 김치양(金致陽)의 반역을 들어 목종을 폐위시키고 대량원군 순(大良院君詢, 현종)을 세워 왕위에 올린 정변이다. 목종의 아버지 경종은 두 왕후를 두었는데, 목종의 생모인 헌애왕후(獻哀王后, 뒤에 천추태후(千秋太后))와 헌정왕후(獻貞王后)로서, 이 두 왕후는 모두 태조의 아들인 욱(旭, 대종(戴宗)으로 추존)의 딸로 경종과는 사촌남매간이었다. 그리고 경종의 숙부이며 태조의 아들인 욱(郁, 안종(安宗)으로 추존)은 경종이 죽은 뒤 그의 질녀이며 경종의 왕후인 헌정왕후와 간통해 대량원군 순을 낳았다. 한편 목종의 생모인 헌애왕후는 경종이 죽은 뒤 천추궁에 거처했는데, 이때 외척 김치양은 거짓 중이 되어 천추궁에 출입하면서 추문이 있자 성종이 김치양을 먼 곳으로 장배(杖配, 장형을 가하고 유배함)했다. 그러나 성종이 죽고 목종이 즉위하자 헌애왕후가 섭정을 해 스스로를 천추태후라 하고 김치양을 소환, 중용했으며, 1003년(목종 6)에 천추태후와 김치양 사이에 아들이 생기자 목종에게 아들이 없음을 기화로 그에게 왕위를 계승시키려 했다. 이들은 당시 태조의 유일한 혈통인 대량원군 순을 경계해 강제로 출가시켜 여러 차례 독살을 시독하기도 했으며, 1009년에는 목종을 살해하려고 대궐에 불을 놓기도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이에 목종은 이러한 음모가 후계자가 정해지지 않았기 때문이라 생각해 신혈사에 있던 대량원군 순을 맞아오게 하는 한편 서경의 서북면도순검사 강조에게 명해 상경(上京)을 호위하게 했다. 강조는 왕명을 받고 개성으로 오던 중에 왕이 죽었다는 헛소문을 듣고 자신이 천추태후에 의한 함정에 빠졌다고 생각해 서둘러 본영으로 되돌아갔으나, 다시 정난(靖難)의 뜻을 품고 군사 5천 인을 이끌고 개성으로 향했다. 평주(平州, 평산)에 이르러 왕이 아직 죽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한때 주저하다가 목종이 살아 있는 한 천추태후와의 관계로 김치양 일파를 제거할 수 없다고 판단, 왕의 폐위를 결심하고 대궐을 침범한 후 대량원군을 맞아 즉위하게 하니 이가 곧 현종이다. 강조는 목종을 폐하고 김치양 등 7인을 잡아 베고 천추태후의 친속과 김치양의 남은 일파를 섬으로 귀양보냈다. 목종과 천추태후는 귀법사를 거쳐 충주로 추방되었는데, 적성(積城)에 이르렀을 때 강조가 보낸 사람에 의해 목종은 살해되고 천추태후는 황주(黃州)로 도망가 거기에서 여생을 마쳤다. 이 강조의 정변은 1010년 거란의 제2차 침입의 구실이 되었다.

    출처 : 한국고중세사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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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김종호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강조의 정변이 비록 왕의 폐립을 자행하고 왕을 살해하여 왕실의 기강을

    바로잡고 왕권의 재정립을 기했다는

    점에 그 의의가 있다 하겠습니다.

    또, 이 정변은 거란의 제2차 침입을 가져오게 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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