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밀턴의 '실낙원' 창작 배경이 뭔가요?
고전문학을 읽다가 '실낙원'이라는 책을 접하게 되었습니다. 사탄이 지옥에 떨어진 것부터 아담과 이브의 타락까지 책 속에 담겨 있었는데요. 책이 쓰인 시기를 고려했을 때 이렇게 종교적인 글이 나올 만한 시기가 아니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존 밀턴이 이 책을 쓰게 된 계기가 무엇일까요?
안녕하세요. 박수진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존 밀턴의 실낙원은 이미 그 구상을 품어두었다가
시기를 미뤄서 창작을 집필, 완성한 것이므로 작가가 평생 간직해온
생각을 말년에 완성한 작품으로 보시면 됩니다.
밀턴은 태생부터 가톨릭 집안에서
아버지대에서 프로테스탄트로 전향했으며,
신학자 토머스 영의 지도를 받았을 만큼
온 생애가 그리스, 로마의 이교주의와 기독교 정신에 걸쳐 있습니다.
또한 밀턴의 3,40대는 제 2차 주교전쟁 등의 종교투쟁의 날들이었으며
오래전부터 가지고 있던 숭고한 영웅서사시를 쓰겠단 결심과
기독교 정신을 바탕에 둬야 한다는 사명감을 더해
나온 결과물이 실낙원입니다.
안녕하세요. 장상돈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질문자님의 질문을 읽으며 문득,
혹시나 질문자님이 실낙원 저작 연대를 중세시대라고 생각하시나 하는 생각을 해 봅니다.
Paradise Lost는 John Milton이 1667년에 발표한 서사시이죠.
이 시기는 이미 중세시대를 지나 문예부흥기를 끝내고, 청교도혁명도 거의 마무리된 시기입니다.
종교개혁이 1517년에 시작되었으니, 백년도 더 지난 시대적 상황이지요.
존 밀턴이 7세에 입학한 성 바울학원에서 라틴어, 그리스어, 히브리어를 배웠고
1625년 케임브리지대학 크라이스트 칼리지에서 라틴어 시를 선보이기 시작합니다.
실낙원을 쓰기 전에 많은 작품을 통해 유명한 작가였고,
영국에서 크롬웰 공화정을 옹호하며 정치적인 우여곡절도 겪었습니다.
1660년 왕정복고와 함께 처형의 위기에 놓이기도 했습니다.
할아버지는 로마 카톨릭교도였고,
아버지는 개신교로 개종했으며, 작곡가로 명성을 쌓았으며, 자식들의 교육에 헌신적이었습니다.
존 밀턴은 12세때부터 자정까지 책을 보는 습관이 있었고, 실명에까지 이르게 된 이유가 독서습관때문이라니.......
옥스포드대학과 케임브리지대학을 거쳐, 문학사와 석사학위를 받았고
대학교육에 만족하지 않고 자유롭게 교양을 넓혀갔습니다.
1638년 감금상태에 있던 갈릴레오와의 만남은 실낙원에 우주에 대한 그 나름의 통찰을 작품 속에 표현하는 계기였을 것입니다.
1642년 메리 파우얼과 결혼과 파탄은 그의 작품 이혼론에서 볼 수 있듯이 애정없는 결혼 강요를 인간존업에 대한 범죄라고 주장했고, 당시 왕당파와 장로파 양쪽으로부터 모두 방탕한 자유사상가로 공격을 받았습니다.
1645년 밀턴은 아내와 다시 재결합했고, 아들과 세 딸을 낳았는데, 아들은 어린 나이에 죽었습니다.
막내 데보라를 낳다가 아내도 죽습니다.
1644년 교육론을 발표하여 시민과 지도자를 양성하는 교육에서 고전과 과학의 역할을 강조했고
1949년 2월 13일에는 '왕과 위정자의 자격조건, The Tenure of Kings and Magistrates'를 출간했는데,
"권력이란 항상 국민에게 있는 것으로 일시적으로 군주에게 양도된다 하더라도 그것이 오용되고 있을 때에는 권력을 되찾고 폭군을 양위시키러나 심지어 처형할 수도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찰스1세가 처형된 2주 후에 출간한 것입니다.
1651년에 밀턴은 공화정 신문 <정치 보도, Mercurius Politicus>의 편집자가 되었습니다.
이 시기에 밀턴은 완전히 시력을 상실하고 실명했습니다.
그의 두번째 아내도 출산 직후 사망합니다.
왕정복고 이후 크롬웰이 처형되고, 밀턴도 체포령이 내려졌지만, 은둔생활을 했습니다.
1660년 대사면령이 내려졌죠.
그가 실명상태였기때문에 왕정복고정부가 위험한 인물이라고 판단하지 않았다는 견해도 있습니다.
이렇게 은둔생활을 하는 시기에 실낙원이 쓰여졌을 것이라고 예상합니다.
존 밀턴의 삶, 아버지의 개신교 개종, 크롬웰혁명과 찰스1세의 처형, 왕정복고, 실명, 결혼생활 등을 모두 살펴본 이유는,
질문자님의 질문이 가진 실낙원이 어떻게 그 내용에 이런 종교적 내용이 담길 수 있었느냐에 답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왜 그의 말년에는 종교적인 글을 쓰게 된 것일까요?
위대한 문학작품이 그렇듯이,
존 밀턴이 정치, 사회적으로 성공하였다면, 이런 작품은 탄생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정치적 실각과 두 아내의 죽음, 자신의 실명, 유배생활에 가까운 삶은 실낙원같은 작품을 남기게 된 원인이 될 것입니다.
말년에 그는 더 이상 정치에 관한 글을 쓰지 않았으며, 삶과 죽음, 인간에 대하여 쓰게 된 것이죠.
실낙원, 복낙원, 투사 삼손을 마지막으로 남겼으며,
세번째 아내는 그보다 오래 살았습니다(^^)
그의 작품에서 가장 놀라운 점은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을 다루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보다 더 놀라운(?) 것은 그는 당대의 카톨릭과 성공회, 칼빈파가 모두 주장한 원죄와 예정설을 거부했습니다.
알미니안이라고 불리는 사상, 인간의 합리적 자유와 책임있는 선택으로 신에게 나아간다고 믿었고, 그것이 그의 말년의 작품 속에 들어있습니다.
존 밀턴은 그가 칼빈주의자라고 믿고 죽었으나, 그의 작품에 담긴 내용은 현대 비평가들의 눈에 알미니우스의 주장에 가깝다는 것이죠.
신과 천사와 사탄 무리, 그리고 인류에 대한 존 밀턴의 묘사는 그의 정치적 행보와 그의 삶에서 경험한 고통들을 어떻게든 설명하려고 시도한 것이며, 나름 인류에게 희망을 전해주려고 노력하고 있는 것으로 봐야겠죠.
질문자님이 혹여나 실낙원의 대서사시의 형식이나 용어때문에 중세시대의 작품으로 보시는 것은 아닌가 싶어서 나름 연대를 설명해 보았습니다.
고대 그리스어로된 가장 오래된 서사시,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를 쓴 호메로스의 형식을 닮았기때문에,
호메로스도 시각장애인이었답니다.
내용만으로는 호메로스의 기원전 8세기 고대 작품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서사시 형식이 주는 장엄함은 현대인에게는 2천년의 시간흐름을 잊어버리게 만들죠^^
안녕하세요. 천지연 육아·아동/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존 밀턴이 실락원을 집필한 시기는 1658년 경으로 봅니다 밀턴의 사회적 배경은 엘리자베스 여왕은 사망한 상태지만 그 문화는 빛을 발하고 있으며 세익스피어 또한 건재한 상태 였기에 그의 작품은 런던 극장가 에서 상연되고 있었습니다 실락원 책은 인간의 마음속에 낙원이 회복되는 과정을 묘사한 서사시 복낙원을 출간해 실낙원과 짝을 맞췄습니다 존 밀턴은 정치적 탄압과 싦명 그리고 가정불화로 시달렸고 17세기 정치탄압으로 물러나 시력을 잃은 후 쓴 서사시가 실낙원 입니다
존 밀턴은 청교도 혁명으로 수립된 정부에 적극 참여합니다. 그후로 정치적 격변을 거치면서 언론 출판의 자유를 주장하는 《아레오파지티카》를 발표합니다.
하지만 그는 왕정복고로 재산 몰수되고, 정치 탄압을 받습니다. 급기야 실명이 되면서 은둔 작가로서 치명적인 삶을 살게 됩니다.
그럼에도 딸들의 도움으로 마침내 완성된 실락원은, 구약성서의 낙원 상실의 동기가 밀턴의 중심적 사상이 됩니다. 또한 청교도 혁명과 그 이후로 이어진 정치적 격변의 고뇌의 과정이 인간의 원죄를 주제로 한 대서사시 실락원에 고스란히 담겨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