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빼어난안경곰147
빼어난안경곰14723.05.24

병자호란이 일어나게 된 배경에는 명과의 강화조약때문인가요?

안녕하세요. 조선시대에는 명이나 청등으로부터 잦은 침략과 약탈을 당했는데요. 병자호란이 발생하게 된 계기가 명과의 강화조약이 발단이 된 것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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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탈퇴한 사용자
    탈퇴한 사용자23.05.24

    안녕하세요. 이승원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1627년 후금(後金: 뒤의 淸)의 조선에 대한 1차 침입 때 조선은 무방비 상태로 후금에 당함으로써 후금에 대해 형제의 맹약을 하고 두 나라 관계는 일단락되었다.

    한편, 조선은 정묘호란 이후 후금의 요구를 들어 1628년(인조 6) 이후 중강(中江)과 회령(會寧)에서의 무역을 통해 조선의 예폐(禮幣: 외교관계에서 교환하는 예물) 외에도 약간의 필수품을 공급해 주었다.

    그러나 그들은 당초의 맹약을 위반하고 식량을 강청하고 병선(兵船)을 요구하는 등 온갖 압박을 가해왔다. 그뿐 아니라 후금군이 압록강을 건너 변경 민가에 침입해 약탈을 자행하므로 변방의 백성과 변방 수장(守將)들의 괴로움은 말로 형언하기 어려웠다.

    이러한 후금의 파약(破約) 행위로 조선의 여론은 군사를 일으켜 후금을 치자는 척화배금(斥和排金: 후금에 대하여 화의를 반대함)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격증하게 되었다.

    당시 후금은 만주의 대부분을 석권하고 만리장성을 넘어 북경 부근까지 공격하면서 정묘호란 때 맺은 ‘형제의 맹약’을 ‘군신(君臣)의 의(義)’로 개약(改約)하자고 요청을 해올 뿐 아니라, 황금·백금 1만냥, 전마(戰馬) 3,000필 등 종전보다 무리한 세폐(歲幣)와 정병(精兵) 3만까지 요구해왔다.

    조선에서는 이러한 그들의 요구에 응하려 하지 않고 화의 조약을 무시하고 후금에 대해 선전 포고를 하려는 움직임까지 일어나기 시작했다.

    또한, 1636년 2월에는 용골대(龍骨大)·마부태(馬夫太) 등이 후금 태종(太宗)의 존호(尊號)를 조선에 알림과 동시에 인조비 한씨(韓氏)의 문상(問喪)차 조선에 사신으로 왔는데, 그들이 군신의 의를 강요해 조선의 분노는 폭발하게 되었다.

    조정 신하들 가운데 척화(斥和)를 극간(極諫)하는 이가 많아 인조도 이에 동조해 사신의 접견을 거절하고 국서(國書)를 받지 않았으며 후금 사신을 감시하게 했다.

    조선의 동정이 심상하지 않음을 알아차린 그들은 일이 낭패했음을 간파하고 민가의 마필을 빼앗아 도주했는데, 공교롭게도 도망치던 도중에 조선 조정에서 평안도관찰사에 내린 유문(諭文)을 빼앗아 본국으로 가져가게 되었다.

    이로 인해 후금에 대한 조선의 태도가 무엇인지를 그들도 비로소 명확하게 알 수 있게 되었고 재차 침입을 결심하게 된 것이다. 같은 해 4월 후금은 나라 이름을 ‘청’으로 고치고 연호를 숭덕(崇德)이라 했으며, 태종은 관온인성황제(貫溫仁聖皇帝)의 칭호를 받았다.

    그는 이 자리에 참석한 조선 사신에게 왕자를 볼모로 보내서 사죄하지 않으면 대군을 일으켜 조선을 공략하겠다고 협박했다. 이와 같은 청나라의 무리한 요구는 척화의지가 고조되고 있는 조선 조정에 받아들여질 리 없었다.

    그 해 11월 심양(瀋陽)에 간 조선 사신에게 그들은 왕자와 대신 및 척화론을 주창하는 자를 압송하라는 최후 통첩을 보내왔으나 조선에서는 그들의 요구를 묵살했다. 이에 청나라는 조선에 재차 침입해왔는데 이것이 병자호란이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병자호란


  • 안녕하세요. 이주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병자호란의 과정은 1636년 만주족과 몽골족 및 한인으로 조직된 12만 8000명의 대군을 친히 거느리고 청 태종이 그해 음력 12월 2일 심양을 출발하여 9일 압록강을 건너 침입하였습니다.

    이때 의주부윤인 임경업은 백마산성을 굳게 방비하고 있었으나 적은 이 길을 피하여 수도로 직행하여 진격하였고, 청의 기병은 우수한 기동력으로 출발한 지 10여 일 만에 수도를 위협했습니다.

    조선 정부에서는 바로 그 전일에야 비로소 청군 내습의 소식을 접하고, 급히 회의를 한 후 주화론자인 이조판서 최명길 등을 적진에 보내어 시간을 얻는 한편, 두 왕자(봉림대군과 인평대군)를 비롯한 왕비와 빈들과 귀족을 우선 강화도로 피난가게 하고 세자와 문무백관을 친히 거느리고 뒤를 따르려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때는 이미 길이 막혔기 때문에 길을 변경하여 소현세자와 신하들정신을 동반하고 부득이 인조는 남한산성으로 피하였습니다.

    얼빠진 임금인 인조는 급사를 명나라에 보내어 원군을 청하고 또 격문을 8도에 발하였습니다.

    그러나 16일에는 이미 청군이 남한산성을 포위하였고, 이듬해인 1637년(인조 15년) 정월에는 청 태종이 도착하여 북한강 강가에 진을 치고 전군을 지휘하였습니다.

    산성은 완전히 고립상태에 빠지고, 성내의 군사 1만 2000 명, 식량 1만 4000여 섬으로 50여 일 간의 보급이 가능할 뿐이었습니다.

    이때 수어사인 이시백은 서성을, 총융대장 이서는 북성, 호위대장 구굉은 남성, 도감대장 신경진은 동성 망월대, 원두표는 북문을 지켰습니다.

    그러나 강화가 함락되었다는 소식과 최명길 등 주화파의 주장에 의하여 인조는 세자와 함께 성문을 열고 삼전도수항단에 나가 치욕적인 굴욕을 당하고 말았던 곳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