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견실한시라소니109
견실한시라소니10923.06.29

조선시대 서자에 대하여 알고 싶어요.

홍길동전을 보면 홍길동은 서자였는데

아버지를 아버지라고 하지 못하고 이렇게

차별을 받았는데요

서자들이 받았던 차별과 현실에서의 대우가 궁금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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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탈퇴한 사용자
    탈퇴한 사용자23.06.29

    안녕하세요. 정준영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혹은 서얼(庶孼)이라고 한다. 본처의 자식이 아닌 첩의 자식을 말한다. 여기서 서(庶)는 양인 신분의 첩의 자식, 얼(孼)은 천인 출신의 첩의 자식이다. 비록 양반의 자손일지라도 서자는 관직에 나갈 수 없었고, 이는 서얼금고법으로 명문화되었다. 조선 초기부터 여러 형태의 차별이 있었으며 <경국대전>에 규정되었다. 조선 초기에는 그나마 군역 등의 의무를 지고 관직에 진출할 수 있었으나 성종 대 이후에는 거의 힘들게 되었다. 그나마 관직도 기술직인 잡직만 가능했고, 품계가 올라가는데 한계를 두었다. 중종 시대 조광조가 서얼들에게 과거의 기회를 주자는 주장을 했다는 기록이 있고, 그 이후 이율곡이 3년의 군역을 거치면 과거기회를 주자는 제안을 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러나 서얼들의 끈질긴 집단 상소와 반란등 여러 가지 사회 문제가 계속 되면서 서얼의 관직 등용 문제는 왕조 내내 쟁점이 되었다.

    광해군때의 일곱 서자의 반란 사건은 유명하다. 그래서 중기 이후에는 일부 허용하는 사례가 있었고 이를 허통이라고 하였다. 하지만 그 실적은 미미하여 1597년(선조 30)부터 1735년(영조 11)까지 138년간 문과 급제자중 서얼 출신은 42인에 불과했다. 1772년 영조는 서얼 출신도 조정의 핵심관직인 청요직에 임명하겠다는 ‘통청윤음’을 발표했고, 비로소 서얼출신도 아버지, 형을 부를 수 있는 호부호형을 허락했다. 정조 대에는 더 나아가 실제적인 서얼의 관직진출이 이루어졌고, 특히 규장각에는 박제가, 유득공, 이덕무, 서이수 등 능력이 탁월한 서얼 출신 신진관료들이 배치되었다. 하지만 오랜 관습으로 정조 이후에는 오히려 후퇴하여 서얼들의 집단 상소는 계속 되었고, 법적인 허용은 1894년 갑오경장에서야 완성을 보았다.

    출처 : 문화원형 용어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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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박일권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서자(庶子)는 첩 소생의 아들을 말한다. 첩 소생의 딸은 '서녀(庶女)'라고 한다. 반댓말은 정실부인 소생의 아들인 '적자(嫡子)' 정실부인 소생의 딸은 '적녀(嫡女)'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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