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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만좀합시다
그만좀합시다23.08.09

이집트 당시에 피라미드 건설이 어떻게 가능했나요?

피라미드 건설에 사용된 공법의 문제를 미루더라도 건설에만 수십년간 수만명이상이 동원되었을 대공사를 할 수 있을 정도로 이집트 지배기간내내 파라오의 권위가 강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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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정준영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고대 이집트를 대표하는 묘 형식의 하나. 방추형의 석조건축물로, 왕묘로 이용되었다(제3~제17왕조). 그리스어 피라미스(pyramis)에 유래하는데, 그 어원에 대해서는 고대 이집트어의 기하학 용어 페르 엠 우스(per-em-us, <우스로부터의 수직선>이라는 뜻), 또는 형태가 유사한 그리스의 과자 이름에 의거하는 등 많은 설이 있어서 확정할 수 없다. 고대 이집트어명은 메르(mer). 피라미드의 출현은 왕묘 독자적인 형식의 창출에 의해서 파라오(왕)를 정점으로 한 중앙집권국가가 확립했다는 것을 나타내고 있다.


    건조의 최성기는 <기자의 삼대 피라미드>로 대표되는 고왕국시대(제3~제6왕조)로, 규모ㆍ기술 모두 최고수준을 자랑하며, <피라미드 시대>라고 하였는데 현재 80여기가 알려져 있다. 피라미드는 왕의 유해 및 부장품을 안치하는 동시에, 현세에는 신의 화신으로서 우주질서를 자신의 손으로 유지하고, 사후에는 신들의 일원으로서 이를 보증하는 존재가 되는 파라오를 위한 공양과 제의의 장이기도 하기 때문에, 피라미드 본체 외에 장제전(상신전), 유역신전(하신전), 양자를 연결하는 참도, 주벽, 때로는 주갱(舟坑)으로 구성되는데 이 <피라미드 복합체>를 둘러싸고 왕비의 작은 피라미드, 왕족ㆍ귀족의 마스타바가 정연히 배치되며, 현세의 국가질서를 내세에 투영하고 있다.

    피라미드 본체는 저면이 정방형의 각추형, 사변은 동서남북으로 면하고, 사면의 기울기는 약 52도, 북면 또는 북측 지표면에 <현실(玄室)>로 통하는 경사통로의 입구가 있다. 석적은 주변 사막대지의 암반을 구성하는 석회암의 절석을 수평으로 쌓아올리고, 동안 투라산 상질의 석회암재로 완장, 마지막에 각을 깎아서 매끄러운 사면으로 완성하였다. 현실(玄實)은 거의 중앙에 위치하는데, 높이는 석적 내부, 기반상, 지하 암반 등에 따라서 부장품용의 묘실이나 기타 부속실을 가지는 경우도 있다. 유체는 현실내의 석관에 안치되며, 매장 후 통로는 화강암의 문이나 결석으로 엄중이 봉쇄되고, 입구도 주위도 같은 돌로 교묘하게 은폐된다. 고왕(故王)의 공양과 제의의 장인 장제전은 피라미드의 동쪽 면에 접하고, 기본요소는 입구홀, 노천의 중정, 조상안치용의 5개의 벽감을 가지는 방, 창고 가짜 문과 제단을 가진 내진으로 이루어지며, 제5왕조 이후에는 남동 구석에 부속 피라미드를 가지는데, 전체는 피라미드 본체를 포함해서 주벽으로 쌓여있다.

    유역신전은 피라미드의 동방, 사막이 경지에 접하는 지점에 설치되며, 왕의 미이라제작과 성정(聖淨)의식의 장으로 본다. 통상 나일강과 수로에 연결되어서 장렬의 배를 위한 주착장을 가지며, 피라미드 건조 중에는 석재운반선의 도착장소이기도 하였다. 장제전과 유역신전을 연결하는 부석의 참도도 석재운반로로서 이용된 후, 석조의 측벽과 대부분의 경우 천장석으로 덮여져서 완성된 것이다. 주갱(舟坑)은 이미 제1왕조 왕묘에서 산견되며, 안치된 배의 성격에 대해서는 논쟁이 계속되는데, 1954년 쿠푸왕의 대 피라미드 남측에 발견되어 복원된 예에서 보아서 본래는 장의용의 배로, 태양신 신앙과의 결합이 강해지자, 태양신이 하늘을 항행하는 <태양주(太陽舟)>의 성격이 부가된 것으로 생각된다.


    최초의 피라미드는 제3왕조 제세르왕이 사카리에 건조한 <계단 피라미드>로 당초 정방형의 마스타바로서 구상되어 5번의 설계변경 끝에 6단의 계단 피라미드로서 완성되었다. 장제전은 후대와 달리 북측에 있으며, 이집트 최초의 석조건축으로서 주벽으로 둘러싸인 강대한 성역에는 벽돌이나 식물재의 건축물을 석재로 모방한 왕궁, 세도 제전, 입구통랑, 제2의 묘, 창고 등이 대(大)ㆍ중(中)ㆍ정(處)을 둘러싸고 있다. 제3왕조의 제왕도 <계단 피라미드>의 건조를 계속하지만 모두 미완성으로 끝났다. 제4왕조 초대 스네프루왕은 제3왕조 말의 계단 피라미드를 방추 피라미드로서 완성한 메이둠의 피라미드, 건조 중에 기울기를 변경한 다흐슈르 남쪽의 <굴절 피라미드>, 당초의 계획대로 완성된 최초의 방추형 피라미드인 다흐슈르 북쪽의 <적색 피라미드>의 3기의 피라미드의 건조에 의해서 진정안 피라미드 형식이 창출되고, 동시에 장제전도 동측으로 옮겨 <피라미드 복합체>의 원형이 완성되었다.

    피라미드 건축의 정점은 쿠푸왕의 <기자의 대 피라미드>로, 최대 규모를 자랑하는 동시에, 석적기술도 최고수준이었으며 기자의 제2피라미드(카프라왕묘)도 거의 동일한 규모로, 유역신전과 이를 수호하는 스핑크스를 잘 보존하였다. 또한 기자의 제3피라미드는 규모는 약 8분의 1로 축소되었는데, 거석재와 화강암재의 사용에 의해서 이를 보충하고 있다. 한편 제5왕조 이후 피라미드의 규모는 축소된 채로 석적기술도 저하하는데 단지, 장제전은 더 한층 중시되며, 구조의 정비, 다양한 부조나 식물주의 사용이 발달하고, 제5왕조 말부터는 무명(無銘)이었던 묘실에도 <피라미드 텍스트>나 가짜 문이 새겨지게 되었다. 또한 제12왕조의 피라미드는 저변의 평균 길이 약 100m, 절석이나 벽돌의 골조 사이를 할석 또는 모래자갈로 메우고 절석으로 외장했다. 묘 도둑의 침입을 막기 위해서 현실로의 통로를 복잡하게 하고, 교묘한 폐쇄장치를 고안했다. 그러나 대부분은 헛수고로 끝나서, 신왕국 때에는 왕묘로서의 피라미드는 방기하게 되었고 대신에 테베의 사인묘 등에서는 암굴묘의 입구 근처에 소형 급경사(약 70도)의 벽돌조 피라미드가 설치되었고, 후에 제25왕조를 세운 나파타 국왕에 답습되었다.


    피라미드 형상의 유래에 대해서는 피라미드 텍스트에서 보아서 고왕(故王)이 승천하기 위한 계단(계단 피라미드), 또는 태양광선의 구상화(방추 피라미드)로 보는 설이 유력하다. 즉, 방추 피라미드의 성립은 태양신 신앙(라)의 확립과 관계가 있으며, 헬리오폴리스의 성석 벤벤의 형상도 영향을 미치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 피라미드의 건조법에 대해서는 고대 이집트인 자신에 의한 기록은 전무한데, 헤로도토스의 『역사』의 기술이나 최근의 실험고고학의 성과에 의해서 개요가 해명되었다고 할 수 있는데 매우 간단한 도구를 이용해서 인간의 숙련된 손과 막대한 노동력의 투입으로서 완성되었다. 이는 벽돌과 모래자갈로 석재운반용의 경사로가 만들어지고, 석적의 진행과 함께 높이와 길이를 늘리고, 정상부에 이르면 외장재의 각을 깎아서 매끄러운 면으로 마무리하면서 철거되었다. 노동력에는 농한기에 해당하는 증수기 3개월간의 농민의 부역노동이 이용되었으며, 최대의 기자의 대 피라미드의 경우에도 10만 명씩 일해서 본체의 건조에 20년으로 충분하였다고 계산되고 있으며 노예노동이 사용된 증거는 없다.

    출처 : 종교학대사전


  • 안녕하세요. 윤지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어떻게 피라미드 건설이 가능했지는 아무도 알 수 없기 때문에 아직도 미스테리로 남아있습니다.


  • 안녕하세요. 이병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이집트 피라미드는 지금으로부터 약 4,000~4,700년 전 건축물입니다.

    고대 이집트인들은 사람이 죽으면 사후 세계에서 되살아난다고 믿었던 신앙에 의해 죽은 파라오가 살 사후 세계의 왕궁을 짓는다는 개념에서 만들어졌습니다. 기본적으로는 무덤으로 설계된 것입니다. 건설 당시에는 근처에 신전과 제사를 지내는 공간, 피라미드를 둘러싼 긴 회랑, 벽 등 부대시설이 함께 있었습니다.

    건축 인부들은 노예라고 알고 있지만 오늘날 학자들의 대체적인 견해는 노예가 아닌 농부들이 건설했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나일강이 범람하여 농사를 지을 수 없는 동안 대체 일거리를 제공하기 위한 일종의 공익사업을 겸한 것이라는 설이 설득력을 얻고 있습니다.